그래도 무섭다
어렸을 적에는 집안에 파리가 날아다녔다. 여름에는 모기에도 자주 물렸고.
1990년대 후반쯤 되니 파리나 모기는 보기 어려워졌다. 다만 날개가 하트 모양인 벌레는 화장실에서 자주 보았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원룸에서 살았다.
파리, 모기는 싫어하는 정도지만 바퀴벌레는 무섭다. 보기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바퀴벌레를 못 보고 지낸지 20년은 된 것 같은데, 재작년 애틀랜타에서 보고 기겁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애틀랜타에는 바퀴벌레가 많아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일년에 몇 번은 본다고 했다. 당시 아파트 단지 내 피트니스 센터에서 봤던 죽은 바퀴벌레는 크기가 정말 무시무시했다. 사망 시점이 하필 주말이라 청소를 안 해서, 그 녀석은 월요일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영화에 가끔 나오는 것은 물론, 한번은 영화 소재가 되기도 했던 '연가시'의 숙주라는 꼽등이는 다행히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요즘에는 그 어떤 종류의 벌레와도 공생하지 않는 듯하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참 고마운 일이다.
대학원 시절, 한 친구가 내게 '더럽게 살자'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인간이 청결을 너무 중시하면 환경 파괴로 이어진다. 따라서 적당히 더럽게 살면 환경 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즉각 반대했다. 환경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위생과 보건도 중요하다는 논리였지만, 사실은 더럽게 살면 벌레가 생길까 두려워서였다.
나는 환경을 꽤 중시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나 자신이 우선이다. 더럽게 살면 환경에는 좋을지 몰라도 일단 아토피성 피부염이 악화될 것이고, 무서운 벌레라도 보게 된다면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은 인간이 생태계를 침범한 결과다. 애초에 우리가 앓는 수많은 병증은 동물의 가축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내가 사는 공간을 곤충류와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 공간은 아마 원래 그들의 것이었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