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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ug 14. 2022

노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집단적 자세

[책을 읽고] 마크 윌리엄스, <늙어감의 기술> (2)

우리는 개인으로서 노화와 죽음을 대면해야 하고, 동시에 집단으로서 사회적 맥락에서 대응해야 한다. <늙어감의 기술>에 대한 두 번째 글은 노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집단적 자세를 다룬다. 


제1부의 제목은 '현실을 인정하자'다.


노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갈등은 오늘날의 당신과 미래의 당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다. (49쪽)


미묘하게, <검은 사기>의 명대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것은 영감과 나 사이의 문제니까 너는 빠져'라고 말하는 쿠로사키에게 하야세가 대답한다. "아니, 너 혼자만의 문제야."



우리는 자신의 문제가 어떤 외부의 요인에 기인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노화도 그렇다. 노화 또는 죽음을 어떤 사건이나 질병의 결과라 생각하고 맞서싸우려고 하면, 문제의 본질을 절대 직면할 수 없다. 저자가 말하듯, 모든 사람에게 사망률은 1, 즉 100%다.


따라서 노화와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문제다. (레이 커즈와일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동시에 노화는 사회 문제다.


노인들은 나와 별개인 타인의 집단이 아니라 미래의 나 자신이다. 사회가 노인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면 우리 모두가 고통받는다. (457쪽)



노화의 사회경제적 맥락


지금 우리는 노인 차별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18쪽)


죽음과 노화를 부정하고 회피하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다. 역사적으로도 생산력이 떨어지는 노인은 차별을 받아 왔다. 처음에는 새로운 혁신으로 등장했던 요양 시설은 오늘날 혐오시설인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학은 죽음을 패배로 받아들인다. 레이 커즈와일과 같이 기술이 죽음을 패퇴시킬 것이라 믿는 사람도 있다.



의미없는 수명 연장을 반대하는 수많은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반대한다. 예컨대 새로운 치료법을 소개할 때 의학계는 주로 '상대적 위험 감소'를 내세운다. 신약이 기존의 약에 비해 사망률을 40% 감소시킨다는 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절대적 위험 감소다. 사망률이 5%에서 3%로 2%p 낮아지면 40%가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죽는 방법은 그 병이 아니라도 차고 넘친다. 


실제로 그런 신약에 투자해서 줄어드는 사망자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망률을 거의 절반으로 줄인다는 신약이라면 어마어마한 투자금이 퍼부어질 것이고, 나중에는 보험 목록에 등재되어 막대한 혈세를 낭비할 것이다. 죽음을 상대로 하는 전투에 쏟아부을 돈의 일부만 완화치료에 투입할 수 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생의 막바지에 훨씬 더 좋은 삶과 죽음을 향유할 수 있다.


노인들이 건강보험을 고갈시킨다는 말도 틀렸다. 어떤 사람의 평생 의료비에서 가장 큰 지출 항목은 거의 예외 없이 마지막 질병이다. 나이와 상관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인이 되어서야 마지막 질병을 앓는 것뿐이다.



사회적 대응이 필요한 부분


요양시설은 애초에 사람을 오랫동안 붙잡아 둘 것이라 생각하고 만든 것이 아니다. 의학의 발달, 그리고 죽음을 패배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지금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병원이나 요양시설에서 오랫동안 고통 받다 죽어간다. <Being Mortal>에서 아툴 가완디가 묘사하는 그의 할아버지의 죽음은 이상적이지만, 더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같은 책에는 요양시설에서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견딜만 하게 만들려는 수많은 시도가 묘사된다. 애완동물 기르기, 독립적인 생활공간 제공 등 다양하지만, 대개 돈이 들며, 정책입안자들이 좋아할 만한 극적인 통계 수치를 뱉어내지 못하는 것들이다. 다행히도, 변화의 조짐도 있다.


북유럽 국가들은 접근 방식이 반대인 모델을 채용하고 있다. 비용도 많이 들고 품질도 들쑥날쑥한 수많은 요양시설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원 서비스가 사람을 찾아간다. (465쪽)


세바스천 세풀베다의 <삶의 마지막 순간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들>에는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대개는 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맞는 죽음이다. 사전연명치료의향서를 써둔 덕분에 완화치료로 죽음을 맞는 사람들도 나오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이것이 최선일까? 어느날 잠 자다가 조용히 가는 것이 아마 최선의 죽음일 것이지만, 그것조차 남은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법륜스님이 말씀하시듯, 당사자에게 최선의 죽음이지만 남은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고통이다.)


모두가 아툴 가완디의 할아버지처럼 죽을 수는 없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학의 막강함이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한 장군은 울타리를 뛰어넘다 발목이 접질려 사망했다. 항생제가 없어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가족들을 불러모아 작별인사를 하고 죽었을 것이다. 아툴 가완디의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세풀베다의 책에 나오는 것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사전연명치료 의향서를 번복하는 환자들도 많다. 결국 끝까지 죽음을 거부하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최선이 아닌 최악의 죽음을 맞이한다.


현대사회는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우리로부터 차단하고, 질병 말기에 놓인 사람들을 식물인간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의학적 능력을 윤리적으로 중요시한다. (501쪽)


이런 태도는 사회적 맥락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적 대응도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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