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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ug 01. 2022

블랙홀은 늪일까 끈적이일까

[책을 읽고] 이언 스튜어트, <우주를 계산하다> (6)

아서 에딩턴은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대체로 악역 이미지다. 찬드라세카르를 몰아붙여 아예 전공을 바꾸게 한 것도 그렇지만, 어떤 기자와의 대담에서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인슈타인과 자신 둘뿐이라 말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뉴턴, 모차르트에서 보듯 천재가 꼭 다윈처럼 인성까지 훌륭할 필요는 없다.


1924년, 아서 에딩턴은 슈바르츠실트의 특이점이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수학적 인공물임을 증명했다. 그는 슈바르츠실트의 특이점이 그가 선택한 좌표계의 특별한 속성임을 보였다. 다른 좌표계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특이점이 아니게 된다. 북극은 현재의 위도, 경도에 따르면 (0,0)이지만 예컨대 자카르타에서 시작하는 좌표계라면 (0,0)이 아닌 다른 값인 것과 같다. (495)



우주의 구조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스티븐 호킹이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시공간의 시작이나 끝이라는 건 없다는 것을, 호킹은 지구모형의 비유로 설명한다. 빅뱅 전에는 뭐가 있었냐는 질문은, 지구의 북극에서 더 북쪽에 뭐가 있냐는 질문과 같다는 것이다.


블랙홀은 실재한다. 블랙홀이라는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양자역학과 상대성 원리의 모순에 대한 통찰도 없었을 것이다. 어릴 적 내게 블랙홀이라는 개념은 공포의 존재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내게 블랙홀은 늪 정도의 이미지였던 것 같다. 한번 잡혀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무서운 존재 말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일화가 보여주었듯, 정말 열 받으면 인간이 늪을 빠져나오는 것은 일도 아니다. (조조의 일화와 너무 흡사한 게 수상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특이점을 넘어갈 수 없다. 사건의 지평선에서 모든 수학은 끝난다. 그러나 세계는 넓고 천재는 많다! 매서(Mathur)는 블랙홀을 늪이 아니라 끈끈이공으로 상상했다.


매서는 블랙홀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했다. 블랙홀을 들러붙을 수는 있지만 관통할 수 없는 fuzzball로 생각한 것이다. 사건의 지평선에 닿는 순간 우리의 정보는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대신 지평선에 얇게 퍼진다. 이 주장은 의심스러우며, 이 경우 외부의 관찰자가 보는 모습과 블랙홀 안으로 진입하는 사람이 보는 것이 달라질 이유가 없어진다는 난점도 있다. (523)


매서의 상상력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만들고 말았지만, 발상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찬사를 보내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찬드라세카르가 영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했던 계산은 결국 맞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찬드라세카르 한계를 넘은 항성이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내게 가장 흥미로운 대안은 '그래버스타'였다.


모톨라(Mottola)와 매저(Mazur)는 중력붕괴하는 천체가 블랙홀 대신 그래버스타(gravastar)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밀도가 아주 높은 물질로 구성된 거품 방울이다. 밖에서 보면 블랙홀과 비슷하지만, 사건의 지평선 대신 차갑고 밀도가 높은 껍질이 있으며, 그 안에는 신축성이 아주 높은 공간이 존재한다. 역시 논란을 부르는 주장이지만, 그래버스타는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에서 도출되는 안정적인 해다. 그리고 정보 역설을 피할 수 있다. 붕괴하는 천체가 사건의 지평선을 형성하기 직전에 이르면 엄청난 중력장으로 시공간의 양자 요동이 왜곡된다. 절대 영도에 아주 가까운 온도에서 동일한 원자들이 같은 양자 상태에 있는 집단이 형성되는 것이다. 사건의 지평선은 시공간에 생겨난 충격파처럼 얇은 중력 에너지 껍질이 된다. 이 껍질은 음압을 미치게 되므로, 안으로 떨어지는 물질은 거꾸로 솟아올라 껍질에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외부의 물질은 여전히 안쪽으로 빨려든다. (524-525)



긴 인용문을 스킵한 사람을 위해 다시 강조하자면, 그래버스타는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에서 안정적인 해로 도출될 뿐 아니라, 호킹과 펜로즈가 벌였던 내기 대상이었던 정보 역설도 해결해버린다. 그뿐 아니라, 그래버스타 이론은 감마선 폭발도 설명한다.


우주 크기만한 그래버스타가 있다면, 껍질의 음압이 미치는 효과가 현재 관측되는 우주의 가속 팽창(일반적으로 암흑 에너지로 설명되는)과 거의 크기가 같다. (527)


순억지 땜빵 개념인 암흑 에너지를 제외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래버스타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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