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Aug 26. 2022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수치심 한 조각은 가지고 있다

조지프 버고의 <수치심> vs 힐러리 헨델의 <오늘 아침은 우울하지..>

조지프 버고, <수치심>


수치심은 모든 문화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인류의 공통적인 감정이다.


시선 회피, 짧은 순간의 정신적 혼란, 그리고 사라지기를 원하는 갈망, 여기에 대체로 얼굴, 목, 혹은 가슴이 붉어지는 증상이 따른다. (버고, 17쪽)


세상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수치심이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난다. 가볍게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기분이나 외모에 대한 자신감 저하에서, 심각하게는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버고는 두 가지 수치심을 구분하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대처 방법이 같으므로 무의미하다.)


버고의 책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대단히 보편적이라는 점, 수치심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방식과 증상, 수치심의 사회적 순기능에 대해 알려주었고, 다양한 사례가 나오는 점이 좋았다. 반면, 책의 구성이 체계적이지 않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이다.



건강한 자존감은 수치심으로부 완전한 독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치심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측면이다. 수치심에 대해서 우리는 <회복 탄력성>을 키워야 한다.


버고는 수치심이 일어나는 경우를 네 가지로 제시한다. 거부 당했을 때, 소외 당했을 때, 치부가 노출되었을 때, 그리고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이런 분류는 흥미롭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대치 관련한 수치심은 기대치를 낮춤으로써, 또는 완벽주의를 느슨히 하여 예방할 수 있지만, 나머지 세 가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들의 애정이나 관심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힐러리 헨델과 변화의 삼각형


힐러리 헨델의 <오늘 아침은 우울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체계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헨델은 <변화의 삼각형>이란 개념으로 우리의 정신 건강을 설명한다. (저자가 만든 개념은 아니다.) 우리는 강렬한 감정(핵심감정)에 압도당할 때, 그것을 억제하는 감정(억제감정)으로 가려버리거나 여러 가지 행동으로 회피(방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억제나 방어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따라서 무력감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방어와 억제감정에서 벗어나 원래의 감정, 즉 핵심감정을 찾아 대면해야 한다. 그렇게 대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를 압도했던 감정을 이겨낼 수 있다.



억제감정은 딱 세 가지다. 불안, 죄책감, 그리고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보편적이고 복합적이며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수치심은 견딜 수 없는 것이어서 거의 무제한의 에너지가 수치심의 방어에 나선다.


수치심에 관해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당연하다.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헨델, 311쪽)


수치심은 결국 자기 자신을 내보일 수 없다는 감정이다. 수치심을 이겨내지 못하면 절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대면할 수 없다. 극복 방법은 다른 방어나 억제감정과 같다. <변화의 삼각형>을 거슬러 올라가 원래의 감정을 대면하는 것이다. 수치심을 극복하면 진정한 자기를 내보일 수 있게 되어 안도감을 느낄 수 있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


수치심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거부의 경험이 수치심을 만든다. 짐작했겠지만, 이러한 경험은 대개 우리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유아기 때부터 일어난다. 사소한 거부도 수치심의 씨앗이 될 수 있으며 어릴 적 경험이라면 더욱 그렇다.


수치심은 사회화의 도구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사회적 맥락에서 거부되는 것도 수치심을 유발한다. 성적 소수자, 빼빼 마르지 않은 여자, 튀는 사람은 모두 수치심에 취약하다. '정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수치심의 원천이다.



무엇이 수침심을 유발하는가


무엇이 수치심을 유발하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모두가 나의 (   )를 안다면, 나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헨델, 328쪽)


나도 이 문장의 빈 칸을 채워보았다. 나는 과거에 아토피성 피부염을 숨긴 적이 있다.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입원하여 2주간 결석하게 된 다음, 강사에게 '열사병'에 걸렸다고 얼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내게는 '아토피성 피부염'이 저 빈 칸에 들어갈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숨길 수는 없었다. 다른 이유를 둘러대면서 결근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나 가능할 뿐이다. 결국 나는 내 병을 털어놓았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혐오가 아니라 동정이었다. 내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벽주의 또한 수치심의 한 증상이다. 결국 '완벽'은 '정상'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완벽이란 단어에는 대개 '한때 나는 중요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창피당하지 않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애초에 그 중요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밝히면 완벽주의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헨델, 332쪽)


초등학교 6학년 때, 반장 선거에서 처음으로 떨어지고 한 달 넘게 부모님께 그 사실을 숨긴 적이 있다. (당시 나를 패배시킨 친구가 누구인지 아직도 기억할 정도로 내게 큰 상처였다.) 내게도 결국 '그 중요한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물론 나중에 그 사실을 아신 부모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나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이 경험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경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 경험을 대입해 보니, 수치심 극복이 바로 그 감정의 대면에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수치심을 이겨내는 법


수치심을 이겨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 자리를 피한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스로에게 자기연민을 보인다. "불쾌해. 넌 헐뜯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 다음으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수치심으로 차단된 핵심감정은 뭘까? 분노, 두려움, 슬픔, 혐오감 중 하나 또는 여럿일 것이다. 이렇게 핵심감정을 찬찬히 뜯어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버고의 책에도 한 가지 괜찮은 훈련 과제가 나온다. 수치심을 자기도취로 방어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두고 웃지 못한다. 따라서 수치심을 느낄 때마다 이렇게 말해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가 여기 있군, 전에 몇 번이나 했던 그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면서 말이야. 그걸 인정하는 게 생각만큼 나쁜 기분은 아니네. 심지어 좀 웃기기까지 해. (버고, 597쪽)


버고의 책에는 수치심 테스트가 나온다. 64점 만점이고, 평균 27점, 표준편차 16점이다. 나는 평균보다 상당히 낮은 19점이 나왔는데, 좋아할 일이 아니다. 과보호나 외톨이일 경우 점수가 낮게 나올 수 있으며, 더 나쁜 경우는 지금까지 수치심을 열심히 회피하고 억누른 결과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이겨낼 수도 있다 ㅡ.ㅡ;;


매거진의 이전글 둔필승총 22082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