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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범: <고백> vs <방황하는 칼날>

by 히말

촉법소년 문제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다. 이들의 범죄가 전체 범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는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들의 범죄 행각이 너무 악랄하다는 점이다.


넷플릭스에서 <소년심판>이 방영되어 꽤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드라마로서는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문제 제기는 다소 아쉽다. 백화점식으로 모든 문제를 보여주려고 하다보니, 초점이 불분명하다.


일본에서 촉법소년 문제는 오랫동안 화두가 되어 왔다. <소년심판>이 촉법소년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려 했다면, 일본 문화계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분명하고 직설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경향이 있다.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이자 영화로 만들어진 <고백>,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방황하는 칼날>을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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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소설 <고백>은 마츠 다카코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충격적인 작품인데, 시작부터 촉법소년과 징벌자의 대결 구도를 보여주고 시작한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영화 포스터 카피도 강렬하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 또한 선명하다. 소년법에 의해 처벌을 면할 것을 알고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선명한 주제를 직설적으로 던지는 초반부의 긴장감이 지나고 나면, 이 영화는 논점 일탈 투성이다. 스릴러로서 긴장감 있는 전개는 계속된다. 그래서 재미도 있다. 그러나 논점은 이미 사라졌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딸을 죽인 범인이 두 명이며, 각각에게 살인죄를 묻기 어려운 구조라는 점이다. 슈야는 미수범이고, 나오키의 경우 살해 의도가 불분명하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정도는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영화의 서사가 지나치게 슈야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가 마치 주인공처럼 묘사된다는 점이다. 슈야는 사이코패스이자 중2병 환자일 뿐인데, 여기에 미즈키라는 인물이 가세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소년법과 일반 법질서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는 해도, 일개 중학생에게 (전직) 선생님의 살의는 상당한 위협이다. 이런 불균형적인 역학 관계를 미즈키라는 인물의 시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슈야는 자신보다 강한 적과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를 획득하며, 미즈키는 언더독 신드롬에 빠져 사이코패스를 응원한다.


우리는 슈야에 대한 유코의 복수가 성공하는지조차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스릴러로서는 분명히 강점인 여러 가지 요소들이, 주제 전달,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감정 전달에 있어 실패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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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 또한 일본과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가 꽤 존재하므로, 나는 둘 중 더 효과적인 서사라고 생각하는 소설에 집중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이 소설 또한 <고백>과 마찬가지로 촉법소년에 대한 정의를 외친다. 그러나 그 방식이 <고백>과는 매우 다르다.


이 소설에서 촉법소년들이 저지른 범죄는 <고백>에 비해 훨씬 더 악랄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훨씬 더 있을 법한 범죄들이다. 무엇보다, 서사 구조가 훨씬 더 단순하다. 이 소설에서 피해자의 유족은 중2병 꼬마와 머리 싸움을 벌이는 대신, 그냥 찌른다. 그래서 훨씬 더 공감이 된다.


피해자를 대신해 정의를 구현하려 하는 나가미네에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심지어 형사들조차 마음속으로는 나가미네가 복수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 "정말 복수를 중단하길 바라나?" "아, 그게," 일단 고개를 떨군 오리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맞습니다. 제 본심은 나가미네 씨가 복수하길 바랍니다." (417쪽)


책을 읽는 우리들은 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정의란 그런 것이다. 악랄한 범죄를 상습적으로, 그냥 욕구 충족을 위해 해온 짐승들이다. 잔인하게 묘사되는 아쓰야의 죽음이 조금도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직설적이며 직선적인 서사 구조는 나가미네의 복수에 대해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소년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서 달성하려고 하는 것은 소년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재검토다. 그래서 <고백>의 수수께끼/스릴러적 서사 구조보다는 <방황하는 칼날>의 직선적인 서사 구조가 훨씬 효과적이다.


아쉽지만, 이 소설에서 정의는 구현되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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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결


<고백>은 영화로서 매우 큰 찬사를 받았다. 나도 두 번은 본 것 같다. 마츠 다카코의 필모는 이 영화가 나오면서 순서가 완전히 뒤집혔다고 할 수 있다. 촉법소년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한 영화로서는 내가 처음 접한 영화였기에,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그러나 메시지 전달은 정말 약하다. 영화의 후반부는 슈야가 주인공인 사이코패스 천재이야기다. 애초에 무슨 영화였는지 잊게 만드는 후반부는 어이도 없지만 식상하기 그지없는 전개다.


<방황하는 칼날>은 한국 영화로 먼저 접했다. 나중에 소설을 만났으나, 읽기를 주저했다.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열 받은 상황인데, 소설로 또 읽으며 다시 분노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분명 훌륭한 작가지만, 모든 작품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불안한 점도 있었다.


그렇게 망설이던 중 지인 추천으로 읽었는데, 읽기를 잘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를 신중하게 접근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냥 붓 가는 대로 쓴 글이 아니다. (단지 결말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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