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톰 롭 스미스, <차일드 44> 3부작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대학생 시절,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쓴 소설을 교수님께 보여드리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너와 상관없는 시대와 인물들에 대해 쓰지?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써야지."
"현대 한국에 왕이 어디 있어요?"
"마피아 보스로 하면 되지."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고마운 조지 시드니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소설도 내가 쓰고 싶어야 쓰는 것 아닌가.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는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쓰지 않았다.
네가 무슨 상관인데?
톰 롭 스미스라는 영국인이 1950년대 소련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2008년에.
조지 시드니 교수님 의견에 따르면, 매우 부적절한 소설이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작가와 아무런 접점이 없다.
판타지 소설이나 다름없다.
판타지 세계를 비판하려고 소설을 쓰다니, 도대체 무엇을 위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세계를 변혁시키려고?
이 소설은 1950년대 소련을 단지 배경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다.
소설의 거의 모든 에너지가 당시 소련 체제 비판을 겨냥하고 있다.
1950년대 소련이라는 시공간이 그저 창작 관점에서 마음에 들었다면 몰라도,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망한 소련이라는 체제를 비판하려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소설을 쓴다고?
21세기를 사는 영국인이라면, 과거의 영국이나 현재의 러시아에 대해 비판적 소설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 영국에 사는 스미스 씨가 1950년대 소련의 실상에 아무리 분노한다 해도
그걸 지금 소설로 내는 것은 그냥 헛발질에 불과하다.
한국인인 내가 2022년에, 에도 막부를 비판하려고 소설을 쓰는 격이다.
에도 막부를 배경으로 소설 쓰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소설의 목적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에도 막부를 비판하려는 데 있다는 점이 문제다.
시체에 칼을 휘두르는 격이니까.
***
더 큰 문제는 이 소설이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방식이 아주 유치하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이 정확한 시점에 역사적 장소에 등장하는 전개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과 같은 소설들에서 많이 보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웃기려는 소설이 아니다.
비판 방식도 아주 1차원적이다.
19세기 통속 소설도 이것보다는 고차원적인 풍자를 담고 있다.
(예컨대 쌔커리 같이 현대에는 아예 잊혀진 작가라도 그렇다.)
그러나, 소설은 재미있으면 용서된다
이 소설은 매우 큰 성공을 거둔 소설이다.
출간 당시 <해리포터>를 제치고 영국에서 1위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뭔가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 이 소설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1권 초반부에 등장하는 아나톨리와 레오의 추격 씬은 웬만한 소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명장면이다.
예상이 충분히 되는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자백제를 투여받은 레오가 자기 이름을 밝히는 장면도 멋지다.
라이사라는 대단히 독특한 캐릭터도 훌륭하다. (극 진행에 따라 캐릭터성이 약해지는 점은 아쉽다.)
2권에 등장하는 선상 폭동 및 수용소 폭동 장면,
3권에서 묘사되는 아프가니스탄 역시 흥미진진하다.
등장인물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작가의 태도도 돋보인다.
2권에서 티무르와 말리샤, 3권에서 라이사가 죽는 장면은 "엉, 정말?"이라는 반응이 저절로 나온다.
대개의 작가들이 아끼는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우리는 늘 보아오지 않았던가.
(심지어 아끼는 캐릭터를 '되살리는' 추태도 수없이 보아왔다.)
소련 체제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 캐릭터가 적절한 타이밍에 리타이어하는 것도 비장미를 보강한다.
예를 들면, 나는 1권 초반부 추격 씬에서 아나톨리가 주인공인 줄 알았다.
아나톨리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론 죽었다.
그런데 그가 죽는 장면은 나오지도 않는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의 대사 한 마디로 죽었다는 사실이 전해질 뿐이다.
소결
대단히 흥미로운 소설이었지만, 뻔하고 유치한 전개가 발목을 잡는다.
2권 후반 쯤에는 정말 가관이군, 이라는 생각과 함께, 정말 3권에서 마무리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은퇴를 번복하는 연예인이나 정치꾼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그러나 3권 결말은 깔끔했다. (작가가 나중에 뒤집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음에도, 뒷맛은 깔끔하지 않다.
조지 시드니 교수님의 한마디는 여전히 유효한 비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