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스냅샷이 아니다

[책을 읽고] 레프 톨스토이, <신부 세르게이>

by 히말

내가 읽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악마>, 그리고 <신부 세르게이>와 한 묶음으로 된 책이었다. <악마>는 별 감흥 없는 이야기였으나, <신부 세르게이>는 달랐다.


객관적으로 보면 두 작품 다 별 볼 일 없는 작품이다. 노골적인 교훈을 알레고리로 들고 나오는 전형적인 톨스토이 단편 망작이다.


그러나 오늘 읽은 <신부 세르게이>는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다시 말하지만, 이 단편소설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 내가 지금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사춘기 때 <죄와 벌>, <좁은 문>이 특별하게 느껴졌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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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카사츠키 공작은 그냥 아주 평범한 젊은 러시아 귀족이다. 그는 어떤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결혼 직전에 그녀가 황제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그 길로 그녀와 파혼하고 얼마 안 되는 영지를 누이에게 넘긴 다음, 그는 수도사가 된다. 여기까지는 몇십 번은 본 듯한 뻔한 이야기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이 단편소설은 이후 전개도 마찬가지로 뻔하다.


그는 훌륭한 수도사가 되었고, 세르게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는 은둔 수도사가 된다. 그야말로 토굴에서 기도만 하는 생활이다. 그런데 어느날 내기를 걸고 그를 유혹하려는 여자가 찾아오고, 그는 유혹을 견디기 위해 도끼로 자기 손가락을 자른다. 얼마 후에는 병자가 그를 찾아와 병을 치료한다.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더는 은둔자라고 하기 어려운 생활을 한다.


그렇게 수도사로서 최고의 자리에 다다랐다고 모두가 생각했을 때, 그는 어느 여자에게 넘어가고 만다. 죄를 뉘우치며 그는 방랑자가 되는데, 어느날 순찰에 걸려 부랑자로 분류되고, 시베리아로 추방된다.


시베리아에서 카사츠키는 어느 부유한 농부의 개간지에 정착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는 주인집 채소밭에서 일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며 지낸다. (384쪽)


이게 끝이다.


***


톨스토이가 이야기하는 세르게이의 삶은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교훈왕 톨스토이 어디 가겠는가.) 세르게이는 사랑의 배신에 신앙으로 도피했지만, 모든 것을 버리는 와중에도 결국 <명예욕>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기를 건 여자가 유혹하러 왔을 때 그는 육욕보다 명예를 택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미 명예의 끝자락까지 올라간 다음에는 하찮은 육욕에 굴복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톨스토이가 독자에게 떠먹여주는 교훈이다.


그녀[세르게이의 누이]는 그가 수도사가 된 것이 자신에게 우월감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고 싶어서라는 걸 알았다. (292쪽)


나는 다른 것을 보려고 한다. 세르게이의 삶은 시작점과 끝점을 연결해보면 그냥 직선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굴곡을 가진 곡선이다. 수도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세속적 욕망과 신심 사이를 오간다. 신앙의 힘으로 모든 것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 그는 추락한다. 부랑자로 낙인 찍혀 시베리아로 추방되는 순간, 독자는 다음 문단에 그의 죽음이 나올 것이라 예상한다. 마지막 페이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오는 것은 앞의 저 문단이다. 시베리아의 어느 개간지에서 잘 산다는 것이다.


<빠삐용>의 더스틴 호프만을 떠올리게 하는 삶이다. 섬에서 돼지도 치고 채소도 기르며 자족하여 사는 것이다. 세르게이 내지 카사츠키라는 인물이 겨우 저런 삶을 얻기 위해 그 장황한 우회도로를 돌아가야 했을까? 물론 아니다. 삶이라는 것은 직선 도로가 아니다.


수도원 생활이 7년째에 접어들자 세르게이는 무료해졌다.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웠고 이뤄야 할 것도 다 이루어서 더는 할 것이 없었다. (298쪽)


그렇다면 묻고 싶다. 우리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멈춤을 결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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