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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

[초단편] 새, 날다

by 히말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들이 하늘에 그리는 궤적을, 나는 눈으로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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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결정된 일이었다. 저녁 8시에 시작하는, 예약 없이 현장에서 입장 가능한 행사를 발견했다. 6시에 강당에서 개최될 명사 특강을 기다리며 햇살을 쬐던 우리들은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기차표를 뒤졌다. 춘천행 기차는 자주 있어서 어렵지 않게 예약했다.


막판에 예약한 자리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기차에 오르자마자 열차 통로에 있는 간이석으로 내달렸다. 세 개씩 묶인 간이석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내가 뭐 딱히 점잖빼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나머지가 되고 말았다. 의자 뺏기 게임이었다면 게임 오버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면, 원준이 지원의 손을 잡고 자리를 잡았고, 그 옆으로 남은 자리를 영표가 차지한 것이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따로 앉느니 그냥 서 있을까 생각하는데, 원준이 외쳤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저쪽 자리 찜해!"


그의 활기에 압도되어서였는지, 아니면 따뜻한 가을 햇살에 나른해져서였는지, 나는 그렇게 했다. 승객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기차가 출발했다. 우리들 외에 복도 간이석에 앉은 사람은 없었다.


괜한 난리통에 뻘줌해진 원준이 말했다. "우리, 게임이라도 하면서 갈까?"


휴대폰에 코를 박은 채로 영표가 대답했다. "애냐."


지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이 그녀 얼굴의 실루엣을 흐릿하게 했다. 그녀가 갑자기 이쪽을 바라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간이 나를 감싸 숨겨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좁다. 자리 옮길래." 지원이 일어섰다.


"내... 내가 옮길께. 넌 앉아 있어." 원준이 재빠르게 가운데 좌석에서 일어나 내쪽으로 달려와 앉았다. 원준은 자리를 잡고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뻘줌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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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기!"


얼마나 지났을까,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가 일어섰다. 기찻길 옆 호숫가에서 쉬던 철새 한 무리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원준은 물론, 지원과 영표도 고개를 돌려 내가 바라보던 방향을 따라갔다.


"철새들인가 보네. 지원아, 새 좋아해?" 원준이 물었다.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눈으로 새들을 따라가며 지원이 말했다.


"아니지만?"


"날 수 있다면 참 좋겠지?"


그녀라면 날아올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춘천이 처음이라는 지원의 말에, 영표가 들뜬 목소리로 관광 안내를 하겠다고 나섰다. 원준이 자기도 많이 와봤다고 말하자, 영표는 외할머니 댁이 춘천이라고 대꾸했다. 춘천이 처음인 나는 가만히 있었다.


춘천에 왔으면 닭갈비라는 원준의 말에, 영표는 그건 외지인들이나 찾는 음식이라면서 막국수가 좋다고 했다. 원준은 지지 않고 국수 먹고 배가 차겠냐고 말했고, 영표는 그건 그렇겠다고 대꾸했다. 나는 내심 닭갈비 쪽에 손을 들고 있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닭갈비는 냄새가 배지 않을까. 우리의 목표는 8시에 열리는 '썸남썸녀 페스티발 아니었던가. 닭갈비 향을 코팅하고 거기 가자는 건가.


"아... 냄새 나겠다." 원준이 갑자기 생각난 듯 이야기했다.


"지원이는 먹고 싶은 거 없어?" 영표가 물었다.


지원은 이제야 묻냐는 듯한 표정으로 경쾌하게 대답했다.


"춘천은 처음이니까 닭갈비 먹고 싶은데."


닭갈비 집을 나서면서 우리는 페브리즈를 몸에 감았다. 레이디는 손 댈 필요 없다고, 자기가 뿌려주겠다고 하는 원준의 말에 지원이 대답했다.


"난 페브리즈 싫은데. 그냥 갈래."


우리는 곧바로 수긍했다. 지원에게 닭갈비 아니라 더한 냄새가 나더라도 무슨 상관이랴. 원디렉션의 <What Makes You Beautiful>의 현신인지, 지원은 정말 외모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군대라도 갈 것처럼 짧게 잘랐던 그녀의 머리도 이제 많이 자라서, 그냥 단발이라고 할 만한 길이가 되어 있었다. 지난 가을, 체육 과목으로 유도를 듣던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확 짧게 자르고 나타났다. 운동하기에 거추장스럽다고 했다. 군대 가도 되겠다고 장난치듯 얘기했지만, 우리 과 남자들은 짧은 머리에도 빛을 발하는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있었다. 여자들이 질투한 것도 아니었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귀엽다고 난리였다. 키가 167인데 귀엽다니, 지원보다 키도 작은 애들이 할 말인가 생각했지만, 그건 그냥 예쁘다는 뜻이리라.


"우리 가는 데, 저쪽이던가?" 지원은 양팔을 벌리고 앞으로 뛰어갔다. "냄새 없애야지."


그녀가 새처럼 날았다.


***


서연은 마카롱을 참 좋아했다. 카페에서 인당 하나는 꼭 먹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두 개를 주문했다. 그리고 언제나 내게 반 개를 내밀면서 내가 1.5개를 먹게 했다. 나는 서연의 이 자국이 난 마카롱 반쪽을 잘만 받아먹었다. 쬐그맣고 달기만 하지만 그렇게 비싼 걸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뭐, 나름 뽀뽀는 한 사이였으니까.


서연은 내가 입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였다. 권서연, 김도하. 번호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사귀라는 신의 계시라고 서연이 말했다. 남고 출신으로 그때까지 짝사랑 밖에 없던 나는 냉큼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카페에서 빙수를 나눠먹고, 놀이공원에서 함께 사진도 찍고 싶었다.


내가 지원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물론 아니다. 웬만한 과들은 다 통합 학부로 뭉쳤지만, 우리 과는 딱히 통합할 데도 없어 자투리로 남은 30명 짜리 작은 과였다. 아니, 과에 수백 명이 득시글 했더라도 지원의 존재를 모를 남자가 어디 있을까. 뻔한 얘기지만, 용기가 없었다. 아니, 용기를 낼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저런 애가 날 거들떠 보기나 할까.


그렇게 우리들은 3학년이 되었고, 지원은 아직도 혼자였다. 아니, 혼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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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고맙긴 한데, 이건 왜 주는 거야?"


지원이 내게 물었다. 내가 내민 조그만 선물 박스를 그녀가 산뜻한 손놀림으로 건네받았다.


"알바 하는데서 주더라. 난 그거 너무 달아서 안 먹어."


나는 준비했던 거짓말을 했다.


"마카롱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녀의 말은 내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 내가?"


"서연이가 그러던데. 마카롱 킬러라고."


아, 그건 돈이 아까워서... 아니, 그런 대답이 나올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마카롱을 좋아하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연의 이 자국이 선명한 마카롱을 내가 잘만 받아 먹었다는 사실을, 하필 지원이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데. 둘이 별로 친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런 얘기도 하는구나. 아니, 그렇게 느긋하게 감상을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그냥 그렇게 서 있다가 뭐든 핑계를 대려고 입을 떼었다.


"좋아서 먹었던 게 아니라..."


"아냐. 뭘 그렇게 놀라. 아무튼 잘 먹을께."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마침 도착한 지하철 문 안쪽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냥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한 채로 서 있었다. 나중에 이 장면을 곱씹어 보면서 나는 뭔가 딱 맞는 대사를 찾아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은 아니었다. 지하철 문이 닫혔다. 출입문 창 앞에서 지원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왼손을 들어 그녀에게 흔들었다.


성격 괴퍅한 교수가 고마웠다. 그가 엑셀 랜덤 함수로 뽑았다는 2인 1조 과제팀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원에게 선물은커녕 몇 마디 말 붙일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워 눈을 감으니 지하철 유리문 사이로 그녀가 내게 손을 흔드는 장면이 무한 반복 재생되었다.


***


서연은 금방 다른 남자친구를 찾아 떠나갔다.


"우리, 아주 진지했던 것은 아니었잖아?"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나는 이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강남 어딘가에서 헌팅 당했다는 말과 함께, 서연은 그 남자와 주말에 바다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얘기로는, 그 남자의 자동차가 아우디라고 했다. 학생일까 직장인일까.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에 밀렸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아무리 가벼운 만남이었다 하더라도 상처는 상처였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어도 내게는 가벼운 만남이 아니었다.


***


우리 넷은 목요일 오후에 같은 수업을 듣는 같은 과 친구들이었다. 경쟁률 빡신 과목 수강 신청에 실패한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듣는 과목이었다. 첫 수업 시간에 교실로 들어가면서 영표를 만났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수강 신청 운이 없기로는 나와 대등한 수준인 영표는 종종 나와 같은 과목을 듣고는 했다.


교실에 들어가니 매우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맨 앞자리에 앉은 짧은 머리의 여학생, 지원이었다. 갑자기 교실 창문으로 봄 햇살이 물결치는 것 같았다.


수강 신청 변경 기간에 원준도 이 과목으로 넘어왔다. 그렇게 우리들은 200명이 듣는 수업에 넷뿐인 같은 과 동기라는 공통 분모로 목요일 오후를 함께했다.


보통은 수업 듣고 늦은 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는 정도였지만, 그날은 6시에 강당에서 명사 강연이 있을 예정이었다. 원준이 그걸 함께 듣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커피를 픽업해 나와 잔디 위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영표가 '썸남썸녀 페스티발'이라는 이벤트를 찾아냈다. 8시, 춘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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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사 장소는 지자체 소유의 실내 체육관이었다. 농구대가 옆쪽으로 치워져 있고, 테이블이 바둑판처럼 깔려 있는 가운데로 텅 빈 공간이 댄스 플로어였다. 가벼운 알콜 음료를 마시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개그맨이 사회를 맡아 썸타는 분위기를 만들어보겠다는 포맷이었다.


지자체 행사였지만, 어차피 서울에서 원정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면서 친해져 보라는 것이 행사 취지였겠지만, 그리고 대개 그런 이유로 온 것이겠지만, 우리들은 달랐다. 나도 영표도 원준도, 지원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원아, 나가자."


원준이 말했지만, 지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텅 비었잖아. 사람들이 좀 나온 다음에..."


원준이 너무 성급했다. 나는 쌤통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V자를 그렸다. 영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


"에? 정말이야?" 지원이 테이블에 팔을 기대면서 내게 물었다. 작은 테이블에 그녀가 기대오자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 그녀의 향기가 들숨을 타고 폐로 들어와 심장을 휘저어 놓고 있었다.


"응. 2번 권서연, 3번 김도하."


"아하, 그런 이유를 대면서 작업을 걸 수도 있는 거구나." 그렇게 말하고 지원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처음에 그렇게 말하더라."


"후후, 도하는 생각보다 꽤 어리숙하네. 아니, 순진한 건가?"


"서연이가 날 좋아하기는 했을까? 아니었겠지?"


"사귀자고 할 당시에는 당연히 도하를 좋아했겠지?"


"그래?"


내 목소리에는 아쉬움을 필두로 해서 원망, 그리움, 불신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안개처럼 잔뜩 끼어 있었다. 서연과 헤어진 지 아직 두어 달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그런 이유였다면 나랑 사귈 수도 있었겠다. 3번 김도하, 6번 김지원. 충분히 가깝잖아. 게다가 배수네."


휴일에 카페에서 만난 건 과제 준비 때문이었다. 심장 쪽 혈관에 뭔가 따뜻하면서도 간지러운 것이 돌아다녔다.


***


영표는 행사의 취지에 맞게 처음 만난 여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원준은 혼자 춤을 추면서 이 여자 저 여자 앞을 서성거렸다. 뮤직 비디오를 보고 꽤나 연습을 했는지, 양팔을 들고 위아래로 내지르는 폼이 브루노 마스 비슷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나는 지원에게 다가갔다. 딱히 정해진 테이블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원이 내 음료잔을 들고 있어 주었다. 그녀가 내게 음료를 건넸다.


"고마워."


라고 말했지만 지원은 듣지 못했는지 대꾸하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자, 다들 가운데로 나오세요! 용기를 내세요!"


음악 소리가 확 줄어들면서 사회자 개그맨의 멘트가 들려왔다. 중간 중간에 그가 추임새를 넣을 때마다 사람들이 호응하기는 했다.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도 사회자의 말을 핑계 삼아 옆 자리의 이성과 짝을 이루어 댄스 플로어로 걸어나갔다.


"아, 이거 실홥니까?" 개그맨이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저쪽 여자분! 혼자이신 거예요? 아니, 여기 남자분들 뭐 하시는 거예요?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잖아요. 슬리핑 뷰티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어줄 왕자님 없어요?"


이렇게 긴 멘트라니, 브루노 마스의 노랫소리가 15초는 뮤트된 것 같았다. 음악 소리가 다시 커졌을 때, 노래는 이미 카디 B의 파트로 들어가고 있었다.


추임새가 효과가 있었다. 옷차림에 돈 좀 쓴 것 같아 보이는 남자가 어디에선지 나타나 지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자는 공주님은 용감한 왕자님의 손을 잡아주세요!"


사회자가 이쪽을 직접 바라보며 떠드는 상황은 지원도 거부할 수 없었나 보다. 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내게 건네주고,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그녀와 함께 댄스 플로어 쪽으로 걸었다. 나는 양손에 음료를 든 채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석에 빈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걸었다. 테이블에 도착해서 잔 두 개를 내려 놓고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무대 가운데로 걸어나가는 둘을 바라보았다. 지원이 내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새들이, 날아올랐다. 마음속의 자유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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