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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Nov 11. 2022

소승불교 대 대승불교

[책을 읽고] 법륜 스님, <법륜 스님의 반야심경 강의> (2)

소승불교과 대승불교에 관해서는 학교 다닐 때 간략하게 배운 것이 전부다. 즉, 자신의 해탈에 집중하면 소승불교, 다른 사람들의 해탈까지 생각하면 대승불교다. 소승불교는 동남아와 티베트까지, 대승불교는 동북아에서 주류가 되었다. 


강신주의 <철학 대 철학>, 그리고 법륜 스님의 <반야심경 강의>를 통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사이에 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 글에서는 그런 부분을 배제하고, 가장 원초적인 차이점,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해탈을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대승불교의 문제점


나는 오랫동안 소승불교가 옳은 길이며, 대승불교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 이유는 첫째, 스스로 깨닫기도 극히 어려운데 어찌 감히 남을 깨우칠 수 있겠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즉, 가능성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둘째, 남의 해탈을 도울 수 있다면, 반대로 남의 도움을 받아 해탈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즉 별 노력 없이 해탈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평소 악행을 저지르며 살다가도 공양미 3천 석 정도 하면 해탈할 수 있다는 얘기로 비칠 수 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정진은 승려들만의 일이 되었고, 대중은 승려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해탈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정진하려 하지 않는 대중에게 해탈은 모호한 개념이 된다. 따라서 대중은 해탈이 아닌 구복을 원하게 된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면, 행복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쾌락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타락하는 방법


구복신앙으로 불교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일본 불교다. 술과 고기를 먹고,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알다시피 <금각사>의 주인공은 중의 아들이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위패에 고개 한번 숙여주고 돈 받고... 전쟁광 덴노의 대량 살육 파티에 한 몫 돕기도 한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라면 이런 식으로 계율을 깨도 좋겠지만, 어느 큰 스님의 말씀 대로 계율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승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안 간다고 하니 나도 그만두겠다는 식으로 원래의 정신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남들이 아무도 안 간다는데 나 혼자만 가면 뭐 하느냐고 아예 강 건널 생각을 안 한다면 그는 대승 보살이 아니라 그저 중생일 뿐입니다. (49쪽)



구분하는 것 자체가 법상이다


<반야심경>의 메시지는 제법이 공하다는 것이다. 사다리는 오르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인데, 그 사다리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승불교 대 대승불교라는 구분 자체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반야심경>이 소승불교를 비판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제법무상에 역행하는 것 아닌가.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보디사트바가 대승 보살 사상을 견지할 수 있을까? 사트바는 중생이며 보디는 부처다. 보디사트바(보살)은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으나 강을 건너기 직전에 잠시 멈추어 다른 이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를 말한다.


생각해보자. 반야심경의 핵심 메시지는 강을 건넜다면 배를 버리라는 것이다. 제법 또한 공하므로 법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디사트바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대승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바로 그 법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그런 내적 모순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것 아닐까? 수많은 승려들이 대승의 길을 걷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그런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수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소승 불교의 입장이다. 그냥 깨닫는 것도 어렵다. 남을 가르치는 경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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