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바운드, <지도로 읽는다 삼국지 100년 도감>
삼국지는 어쩌면 정치, 종교만큼이나 위험한 대화 재료다. 워낙 매니아도 많은데다,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들조차 나름대로 정형화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 의견 대립이 쉽게 일어난다. 예컨대 조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개 "정말? 왜?"라는 말을 듣게 된다.
2년 전 여름, 중국 여학생과 삼국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씨가 Lu였기 때문인데, 알다시피 여포의 '여'씨다. 삼국지 캐릭 중에 누굴 좋아하냐고 묻자, 그녀는 말했다.
어릴 때는 조운을 좋아했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 강유가 좋다. 그가 짊어진 책임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서다.
대단히 독특한 의견은 아니다. 강유의 별명 중 하나가 <소년 가장> 아니던가.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강유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은 그야말로 고정관념이고,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 책에 나오는 강유를 한번 살펴보자.
- 비의가 죽은 후에는 대외 정벌에 적극적인 강유가 군권을 잡고, 거의 한 해도 빠짐없이 위나라 영토에 침공한다.
- 등애에게 패한 후, 강유는 대장군 대행으로 강등되었으나 곧바로 대장군에 복귀한다. 촉한에서는 강유의 무리한 북벌에 대한 반대론이 강해졌다.
- 연의의 서술과 달리, 강유는 야심을 의심받아 천수 태수 마준에게 버림받고 할 수 없이 제갈량에게 투항한 것이다. 촉한에 목숨을 바친 의리의 용장으로 손꼽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초등학생 시절 내 눈에도 강유의 북벌은 무모하게 보였다. 거의 매번 지면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조가 군사를 일으키면 백성들 괴롭힌다고 설명하면서, 제갈량과 강유가 군사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는 어조가 초등학생 눈에도 이상하게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딱 한 가지만 묻고 싶다. 서촉에 살던 사람들은 과연 유비가 들어오고 난 다음 더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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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삼국지에 대한 관점이 아직도 1차원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중국을 보면, 마오쩌뚱부터가 조조빠였고, 요즘엔 <조조전> 같은 소설이 베스트셀러다. 사마의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대히트를 쳤다. 촉한정통론 따위는 개에게 준 지 오래된 듯하다. 한국에도 위빠는 상당히 많아, 촉빠와 대등한 세력을 이루고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게임을 만드는 고에이(KOEI)사를 제외하면 아직도 촉한정통의 연의적 시각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사료를 거의 참조하지 않으며, 참조하는 경우라도 겨우 정사 정도이고, 그런다 해도 연의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우에스기 켄신이 여자였다는 설 같은 거 가지고 옥신각신하느라 삼국지 사료 읽을 시간이 없는 듯.)
이 책이 딱 그렇다. 관우가 단신으로 원소군에 처들어가 안량의 목을 베어 왔다니... 정사 참고했다며?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그나마 적벽 대전 때 제갈량이 동남풍 불게 했다는 얘기는 안 해서 다행이다.)
게다가 이 책은 <지도책>을 표방하고 있으나 지도 부분이 매우 빈약하다. 나는 몇 년 전 장패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면서 서청주 지방에 관해 자세하게 공부한 적이 있는데, 인터넷 검색으로도 이 책보다 훨씬 나은 수준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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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물평은 상당히 괜찮다. 예컨대 위연, 법정, 유비, 조진에 관한 인물 총평은 연의의 삐딱한 시각을 교정하여 상당히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법정은 일반적으로 삐딱한 인간성의 책사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유비의 총애를 받은 총신이다. 유비가 시호를 내린 것은 관우, 장비, 법정 딱 세 사람뿐이다.
유비에 관한 평가도 거침 없다.
유비의 인생은 이른바 배신과 속임수로 점철된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유비가 배신당한 적은 거의 없으니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355쪽)
위연은 연의에서도 꽤나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그건 그가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제갈량을 배신하기 때문일 뿐, 실제로는 평면적 악인으로 묘사된다. 현대한국사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이승만에 관해 미국 정부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나쁜놈이긴 한데, 우리편 나쁜놈이다(He's an S.O.B, but he is OUR S.O.B.)"라고 말했는데, 연의가 위연에 대해 가진 생각이 딱 그거다.
그러나 위연은 유비가 총애하던 신하 중 하나다. 한중을 점령하고 한중왕이 된 유비가 한중태수로 세운 것이 위연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서울시장 식의 러닝 메이트라 할 수 있다.
연의에서는 아예 삭제된 손권의 막장 행보도 잘 다루고 있다. 손권은 태자를 여러 차례 바꾸면서 신하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싸움을 하게 했는데, 그 과정이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육손은 연의에서도 슈퍼스타이긴 한데, 주인공 유비를 개박살낸 사람이라서 조금 미묘하다. (그래도 관우를 죽인 여몽 수준의 막장 각색은 안 당했다.) 실제로 육손은 강남 유력 호족인 육씨 집안의 대표였고, 전쟁 수행은 물론 행정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사람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군주가 아닌 사람으로 별도로 전이 편성되어 있는 것은 제갈량전과 육손전뿐이다. (대개는 여러 명이 한 세트로 나온다. 예컨대 오호대장은 관장마황조전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