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Nov 02. 2022

더욱 모호하게

[책을 읽고] 미카엘 로네, <우산 정리> (4)

앞서 바빌론 사람들의 위대함이 수를 추상화시킨 것이라 말했다. 머릿속에 양을 상상하지 않고 수를 셀 수 있는 것이, 뉴튼의 수학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첫 걸음이었다. 일단 추상의 영역으로 발을 디디자, 인간의 상상력은 끝을 모르게 내닫는다.



유클리드의 제5공리


임의의 한 직선과 한 점이 있을 때, 이 점을 지나면서 주어진 직선과 평행한 직선은 유일하다. (278쪽)


유클리드의 제5공리, 즉 평행선 공리는 오랫동안 정말 공리인가 하는 의심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해답을 제시하는 책을 만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공리 없이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어디까지가 파랑이고 어디서부터가 남색인지 헷갈려 왔는데, 그건 저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이누이트 사람들은 흰색을 여러 가지로 구분한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게 낭설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 책에는 파푸아뉴기니에 사는 수렵채집인, 베린모스(Berinmos) 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색깔 인식이 세계 표준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데, 예컨대 그들이 Nol이라 부르는 색은 우리가 보는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을 넒게 포괄하며, Wor라는 색은 노란색, 주황색, 그리고 초록색 일부까지 포함한다.


인간은 3원색을 보지만, 대부분의 새는 4원색을 보며, 갯가재류는 12원색으로 세상을 본다.



벨트라미 원판


원판이 있다. 원판 위에는 2차원 생명체가 산다. 이 생명체를 포함한 원판 위의 모든 물체는 원판 가운데로 다가갈수록 크기가 커지고, 가장자리로 다가갈수록 크기가 작아진다. 따라서 이 생명체에게 벨트라미 원판은 무한하다. 가장자리로 다가갈수록 크기가 무한히 작아져 절대로 원판의 끝자락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868년 이탈리아 수학자 에우제니오 벨트라미가 논문에서 소개한 이 원판은 3차원 세계를 2차원 평면에 표시하면서 벌어지는 지도의 다양한 왜곡을 설명하는데 있어 하나의 예시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원판은 푸엥카레에 의해 유명해져 심지어 이탈리아에서도 푸엥카레 원판이라 부를 정도다. (구글 검색도 푸엥카레 쪽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


사실 벨트라미의 원판은 공간의 곡률을 생각해보기 위한 도구다. 벨트라미의 논문 제목은 <상수 곡률을 가지는 공간의 기본 이론>이었다. 원판이라는 세상이 가지는 곡률 때문에, 벨트라미 원판에 사는 생물에게 직선은 곡선의 형태로 나타난다.


저 곡면을 2차원으로 투사하면 벨트라미 원판이 된다


유클리드 제5공리의 공리성


기하학은 추상화의 한 예다. 추상화의 또다른 사례인 3단 논법을 보자. 


X는 Y다. Y는 Z한다. 따라서 X는 Z한다.


X, Y, Z에 무엇을 넣든 삼단논법은 성립한다. 따라서, 기하학 역시 그것이 어떤 세계에 적용되더라도 성립해야 한다. 그러니 벨트라미 원판 위에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이 성립하는지 알아보자.


평행선이란 서로 한 번도 만나지 않는 두 직선을 말한다. 그런데 벨트라미 평면 위에서 유클리드 제5공리를 적용해 보면, 한 점을 지나면서 다른 직선과 평행인, 즉 만나지 않는 직선은 무한히 많이 존재한다. 따라서 벨트라미 평면에서 유클리드 제5공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 그렇다면 벨트라미 원판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은 성립하는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정사각형이 존재하지만 항공기 조종사의 기하학에는 정사각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벨트라미 원판에서는 어떨까?


원판의 생물체에게는 정사각형이 없으므로 네 가지 공리만으로는 어떻게 해도 정사각형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제5공리가 필수다. 자, 전 시대를 통틀어 제일 중대한 수학 문제가 사라졌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다섯 가지 공리가 필요하고, 마지막 제5공리가 없으면 안 된다. (349쪽)


그저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2000년 이상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원판 벗어나기


에드윈 애벗의 <플랫랜드>는 2차원 세상에 사는 존재에 관한 걸작 소설이다. 이 책은 사실 소설의 탈을 쓴 수학 교양서라 할 수 있는데, 1884년에 이런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3차원 존재에 이끌려 3차원 세상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신의 섭리에 반한다는 죄목으로 종신 수감되고 만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플랫랜드>의 3차원 구처럼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줄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벨트라미의 원판에는 정사각형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원판이 무지막지하게 크다고 생각하면, 정사각형과 매우 흡사한 도형을 그릴 수 있다. 그 "정사각형"의 내각은 90도가 아니라 89.9999도이겠지만, 벨트라미 문명이 정확한 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충분히 착각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자신이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는 세계에 산다고 착각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우리 인류에게도 일어났다는 점이다. 뉴튼 물리학은 너무 정확해서, 실제 현실과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주 최근까지 알지 못했다. 순전히 계산만으로 천왕성과 해왕성의 위치를 예언한 것이 뉴튼 물리학이다. 어떻게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초콜릿 무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