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에 꽤 한적한 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다. 분명히 아파트이기는 했지만, 동네사람은커녕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평소와 똑같은 진입로로 주차장에 들어가다가 차 오른쪽 반을 벽에 뭉개버렸을 때, 이웃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내 왼쪽을 끼고 주차장에서 나오던 중이었다. '이걸 어째?'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묘한 얼굴 표정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찰나의 순간, 멀어지면서 그의 얼굴이 어쩐지 웃는 얼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참 재미있는 구경을 했다는 듯한 얼굴이랄까. 생각해 보면, 그 정도로 재미없는 동네였다.
애초에 그 아파트 3층에 살 생각을 하는 데는 길 건너 바로 앞에 보이는 빵집이 한 몫을 했다. 동네 빵집이라니, 우리도 이런 호사를 누려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집에 월세 계약을 했다.
그러나 그 빵집은 우리에게 별 효용이 없었다. 시내 슈퍼에서 2프랑이면 사는 빵을 거기서는 무려 5.95프랑을 받았다. 크기가 큰 것도 아니고, 더 맛이 좋은 것도 아니고, 더 좋은 재료를 쓴 것 같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 빵집에는 언제나 빵이 몇 개밖에 없었다. 빵오베르건 건포도계피식빵이건 그냥 올리브빵이건 말이다. 도대체 화덕 크기가 얼마나 되길래 빵이 그렇게 없나, 아니 아예 화덕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어쩌면 우리 집에도 있는 제빵기로 하나씩 만드는 거 아냐? 이런 농담도 했다. 그랬다면 빵값이 그렇게 비싼 이유는 납득이 된다. 제빵기를 몇 시간 돌려서 빵 하나를 뽑아낸다. 그걸 우리 누님을 닮은 국화라도 보듯이 옆에서 지켜보는 빵집 주인. 그 정성이라면 빵값이 슈퍼의 세 배인 것쯤이야.
빵은 맛 없었지만, 나는 그 빵집의 단골이 되었다. 빵은 종류별로 단 한 번씩만 사먹고 그만두었지만, 잼은 얘기가 달랐다. 처음 그 가게에 들렸을 때, 빵이 워낙 없다보니 빵 두어 개와 함께 잼을 산 게 문제였다. 빵은 정말 별로였지만 잼은 달랐다. 헐, 이 잼 뭐지?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냥 딸기잼이네. 그런데 왜 이렇게 맛있어?
그 빵집은 잼도 라면 냄비에 끓이는 건지 진열된 것이 몇 개 없었다. 50년 전통의 라면 냄비 잼집. 한번에 한 뚝배기밖에 안 끓입니다.
많이 사봐야 두 개를 살 수 있었다. 살구잼이나 블루베리잼도 시도해 보았지만, 딸기잼만 못했다. 그래서 딸기잼이 떨어질 때마다 그 빵집에 갔다.
그 때만 해도 아침은 꼭 챙겨먹어야 한다는 주의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빵과 잼을 쟁여둘 필요가 있었다. 14온스밖에 되지 않는 잼 병을 새로 열게 되면, 불안해서라도 퇴근길에 빵집에 들려야 했다.
***
아무튼 그곳은 그렇게 평범한 주택가였다. 트램 정류장 바로 앞이었지만, 근처에 상가라고는 없었다. 중앙역까지 겨우 세 정거장인데 그렇게 호젓한 것도 신기했다. 나는 그곳에서 아무 불만 없이 3년을 살았다. 아, 불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저녁때마다 바닥에 뭔가를 집어 던지는 놀이를 하는 윗층 이웃이 문제였다.
하루는 너무하는 것 같아 경찰에 신고를 했다. 살림살이 다 부수면서 부부싸움을 하는 것 같으니, 누군가 죽기 전에 경찰에서 한 번 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내 억양을 신기해하는 전화선 반대편의 경찰관에게 말했다. 경찰은 꽤 빨리 도착했다. 계단을 통해 윗층으로 사람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안 있어 내 초인종이 울렸다. 미안하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문앞에 나타난 경찰관 두 명 중에 더 젊어 보이는 쪽이 말했다.
외교관이라서 경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랫층 신경 안 쓰고 매일 바닥에 뭔가를 패대기치는 사람이 초인종을 누른 경찰관에게 할 말은 아주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하필 외교관이라는 핑계라. 지금이 19세기냐?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의 외교관이 밤마다 바닥에 뭘 내팽개치는 스포츠를 즐긴단 말이지.
외교관 특권의 가호가 있어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모로코 외교관께서는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경찰관에게 특별히 말해 주었다고 한다. 조용하고 조신하게 컴퓨터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ordinateur. 컴퓨터를 뜻하는 불어, 교과서에서나 봤던 단어를 처음 귀로 들었다.
영어로 내게 말하던 경찰이 왜 컴퓨터라는 단어만 불어로 말했냐고? 경찰은 영어, 독어, 불어에 손짓발짓을 섞어서 이야기했다. 공식어가 네 개인 나라에 살다보면 그러나 보다. 컴퓨터를 독어로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면 다행이랄까. 컴퓨터가 독어로 뭔지는 몰라도 뭔가 무시무시하게 들릴 것 같다.
아랫배가 불룩 나온 오뚜기 체형의 콧수염 대머리 아저씨가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나는 외교관이다. 내가 뭘 하든 상관하지 마라. 나는 단지 @#&$##를 사용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식은 땀이 날 것 같다.
***
12월의 어느날이었다. 아침에 딸기잼 한 통을 새로 열었기 때문에 퇴근길에 그 빵집, 아니 잼집에 들렀다. 빵은 죄다 종류가 다른 빵이 여남은 개, 딸기잼은 14온스짜리 하나뿐이었다.
평소에는 그저 돈만 내고 나오던 가게인데, 왜 그랬는지 나는 주인 아저씨에게 오늘 날씨 참 춥죠 하고 말했다. 공기 온도가 낮은 게 문제가 아니고 해가 너무 일찍 져서 퇴근길이 어두컴컴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겨울은 언제나 실제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스위스 사람 아니신가봐요?" 구구단이라도 외는 듯한 어조로, 빵집 주인이 말했다.
"한국에서 왔어요." 나도 드라이하게 대꾸했다.
그의 눈이 계산대에서 올라와 나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아니, 또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 따위의 말을 하려나. 그런 말을 여러 번 듣다 보니 그런 낌새만 느껴져도 짜증이 났다. 그런데 그는 잠깐 동안 나를 쳐다 보더니, 잼을 넣은 종이 봉투를 카운터에 내려 놓으면서 말했다. 지난 16년간 연습해 왔던 바로 그 대사를 드디어 오늘 하는구나, 라고 그의 눈동자가 말했다.
"삼촌이 한국 전쟁에 나갔었어요."
아 그랬군. 아직도 그 전쟁이 한국에 대한 대표적인 지식인가. 미국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뭐 옛날 얘기가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빨갱이 때려잡아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는 할아버지는 왠지 거북했다. 골프장에서는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는 법이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빵집 아저씨의 삼촌이라. 빵집 주인 눈을 보니, 얘기를 더 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저녁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잠깐 동안이라면 괜찮다는 생각에 나는 대화의 바톤을 이어받았다.
"한국 얘기를 많이 하시던가요?"
"아뇨. 한 번도."
"아 그래요?"
"거기서 돌아가셨거든요. 시체도 못 찾았대요."
삼촌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늘 한국전쟁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의무병으로 따라 나선 삼촌은 전도유망한 의대생이었다. 앙리 뒤낭의 뒤를 잇겠다는 건지, 갑자기 정의감에 불타올라 삼촌은 한국전쟁에 자원했다고 한다. 전쟁터에 막상 도착해보니 뭔가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6개월은 복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만강 건너편에서 중국군이 대대적으로 밀고 내려온 것이다. 개마고원 입구에 자리한 장진호에서 미군은 중국군의 대대적인 포위 공격을 받았다. 미군과 함께했던 삼촌은 아마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을 거라 했다.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장진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곁에 있었는데, 전투가 끝나고 보니 어디에도 없더라, 이런 얘기였다.
"중국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겠군요."
"아니, 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삼촌은 저한테 그저 이야기 속의 인물일 뿐인데."
그도 그랬다. 60년 전에 벌어진 전투. 아버지조차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을 때, 젊은 나이에 정의감에 불타 올랐다가 낯선 외국 땅에서 죽은 삼촌. 추상적인 존재다.
나이를 추측해보면, 빵집 주인은 50대 초중반쯤이 될 것이었다. 갓 의대생이 된 삼촌은 스무살 언저리였을 것이고, 아버지라봐야 둘, 셋, 또는 다섯 살 정도 많겠지. 아버지가 85세 정도라면, 아들은 50대 중반 정도일까. 그래도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지는 않으니 50대 초중반. 어쩌면 40대 후반으로도 봐줄만 했다.
빵집 주인과 눈을 제대로 맞춰 본 것도 처음이었다. 플라티나 블론드라고 해야 할 머리는 이미 많이 벗겨졌다. 이마가 아주 넓다. 하지만 인상은 좋은 편이었다. 눈이 서글서글하고, 인상을 못돼 보이게 할 이중턱은 아직 초기 단계였다. 웃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꽤 균형잡힌 얼굴이었다. 풍채도 있는 것이, 빵 반죽으로 다져진 근육일지도 몰랐다. 제빵기를 쓴다면 그것도 아니겠지만.
"한국, 가보신 적은 있나요?"
"네. 한 번 가 본 적이 있어요. 한 번. 여행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지만,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삼촌일지도 모르는 유해가 발견되어서였다. 빵집 주인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던 시점에서도 벌써 10년 전 이야기였다.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북한 측이 미군 유해 수십 개를 인도할 당시였다. 그중 하나가 삼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미국 측 판단이었고, 주한 스위스 대사관에서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족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스위스 정부가 직접 가볼 것을 주문했다.
이미 70대 고령에 당뇨병을 앓던 아버지가 갈 수는 없는 노릇. 빵집 주인은 그 먼 길을 갔다고 한다. 정부에서 여행경비를 지원했다고 한다. 삼촌의 유해라는 것이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비로 가야 하는 길이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공항에서 서울까지는 어찌해서 잘 왔지만, 그는 서울에서 길을 잃었다. 주한 스위스 대사관이 어디인지 모르는 택시 운전사가 그를 광화문에 내려놓은 것이다. 빵집 주인은 영어가 유창했으나, 택시 운전사는 그렇지 않았다.
빵집 주인은 택시 문 안쪽에 붙어 있던 스티커를 보고 통역 서비스를 호출했으나,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역 서비스는 택시요금 관련한 시비를 해결해 주는 것이 목적이었지, 주한 스위스 대사관이나 가성비 좋은 갈비집을 찾아주는 쪽은 전공이 아니었다. 미국 대사관이 광화문에 있으니 광화문에서 찾아보면 될 것 같다. 그렇게 말하고 통역은 전화를 끊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그는 횡단보도에 파란 불이 켜지자 일단 길을 건너기로 했다. 한여름 땡볕이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그늘이 진 반대편 인도로 건너가기로 한 것이다. 그때, 파란색 배낭을 맨 대학생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Can I help you?"
*** 계속 ***
길 읽은 불랑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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