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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

[단편] 김의 공식 (4)

by 히말

저녁 여덟 시 사십 분에 나는 가게에 도착했다. 낮시간 알바생인 진주 씨에게, '일본식 함바그 도시락'을 숨겨 놓으라고 부탁해 놓았다. 사장이 제일 비싼 도시락을 먹으라고 하는데 삼각김밥이나 먹을 순 없잖은가.


그런데 사장이 나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가게를 둘러보고 있었다. 도시락 코너에 남은 것들 중에 어느 것이 가장 비싼지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장은 급료 체불도, 시간 후려치기도 하지 않는 모범 고용주였지만, 돈 계산은 칼 같았다. 쓸데없이 발생하는 비용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오늘의 경우, 내게 주겠다고 약속한 '가장 비싼 도시락'이 그런 비용이었다. 그걸 미리 체크하려고 나보다 일찍 도착해 있었다.


"어, 진주야. 이거 뭐야? 왜 도시락이 음료수 냉장고에 있어? 그것도 뒤편에. 보이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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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씨는 도시락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음료수 냉장고 뒤쪽에 몰래 숨겨 놓은 모양이었지만, 사장의 예리한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런데 사장은 내가 이십 분이나 일찍 올 줄은 몰랐나 보다. 나는 헛기침 소리를 내고 큰소리로 사장에게 말했다.


"어, 사장님. 그거 제가 먹을게요. 음료수 냉장고에 있다가 버려질 뻔했네요."


사장은 가짜 웃음을 웃으면서 그러라고 했다. 나는 그 도시락을 집어 들고, 진주 씨에게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했다. 사장은 가장 안 팔릴 것 같은 삼각김밥 두 개를 골라 들었다. 사장과 나는 김공식 씨에 대한 담판을 위해 창고 방으로 들어갔다.


***


한 시간이나 대화가 이어졌다. 사장에게도 기회비용이란 개념이 있을 텐데, 김공식 씨의 처리는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하긴, 한 시간을 들여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김공식이라는 폭탄을 든 채로 이 가맹점은 어떻게든 연명을 해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당장 일을 그만두면, 사장은 적어도 며칠 동안 밤 시간대에 카운터를 맡아야 한다. 나중에 밤 시간대 알바생을 구한다고 해도 과연 그가 이 상황을 인내해 줄까? 사장은 내가 알바를 그만두기 어려운 사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내가 비교적 성실하게 근무하는 타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이 협상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사장은 내게 시급 10% 인상을 제의했다. 나는 돈도 좋지만 노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차라리 김공식 씨가 밤교대 시간 내내 창고 방에서 잠이나 자는 게 더 나았다. 그렇게 하면 일은 더 힘들겠지만, 적어도 놀면서 돈 버는 사람을 눈앞에 보면서 일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 입장도 생각해야지. 밤새 거기 갇혀 있으라고 하면 그 사람 마음도 아프잖아."


이쯤 되니, 나는 세상에 보기 드문 인류애의 장본인을 그동안 몰라본 것이 황송해졌다. 아니, 노는 사람에게는 노는 공간이 주어지면 오히려 더 좋은 것 아닌가? 김공식이라는 사람에게는 일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놀면서 돈 번다는 자랑질을 하는 게 존재의의라도 된다는 건가?


"아니 무슨, 회사에서 책상 빼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로 상처를 받습니까. 알바인데. 그리고 그 사람은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노는 공간 확보되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왜 도대체 남의 속을 뒤집어 가면서 놀아야 합니까?"


그 사람도 양심이 조금은 있어야 하지 않냐는 말을 하려다가 또 그만두었다. 김공식에게 양심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 턱이 없고, 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까지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 예단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 사람도 가정이 있는데, 자식들 볼 면목도 있어야지."


아, 가족이 있었구나. 그런데 저렇게 살다니. 역시 세상을 향해서는 차도남이지만, 내 마누라, 내 새끼한테는 따뜻한, 그런 남자인가. 그러니까, 밤 열 시에 집을 나오면서, "아빠 자랑스러운 일터에 다녀올께"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내가 눈앞에서 그 사람이 노는 꼴을 감내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


나는 결국 사장의 애원에 굴복했다. 시급 10% 인상,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사장이 밤 시간대에 순찰을 나온다는 조건이었다.


조건을 잘못 내걸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딱 일주일이 걸렸다. 약속은 확실하게 지키는 사장은, 일주일이 경과되기 직전에 가게에 나와 한 시간가량을 가게에서 보냈다. 그런데 평소에는 나에게 석화 광선만 쏘던 김공식이 사장 앞에서는 아주 말문이 터졌다. 그는 말도 없이 컵커피 두 개를 가져와서 자기와 사장 앞에 하나씩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날 잡지를 베고 자던 바로 그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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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에 계룡산에서 어떤 도사님한테 침술을 배웠는데요, 사장님 그거 언제 한번 놔드릴게요. 이게 사람한테 아주 중요한 혈 자리가 열네 군데가 있는데, 이게 보통 도사들은 열두 개밖에 몰라요. 그래서 그 도사님이 대단한 건데. 그 두 개 혈 자리가 아주 중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 자리에 침을 잘못 놓으면 사람이 반신불수가 될 수 있어서 돌팔이들은 아예 그 혈 자리를 무시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운이 좋아서 그 도사님 제자가 돼서 그걸 배웠죠. 그 도사님이 원래 제자를 안 받는 성격인데, 제가 인상이 좋다고 하면서. 아, 그렇지. 제가 이제마 사상체질에서 태양인이거든요. 태양인 이게 참 드문데, 제가 아주 전형적인 태양인이죠. 눈부터 부리부리하잖아요. 아무튼 그래서 제가 인상이 좋으니까 그 도사님이 저를 제자로 받아준 건데, 도사님이 시간이 없다고 딱 이틀 동안 아주 집중해서 저에게 비법을 전수하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비법을 전수 받자마자 제 아들놈한테 침을 놔줬는데, 전에는 비실비실하던 놈이 지금은 학교에서 축구 대표선수예요. 아주 날아다닌다니까요? 딱 보니까 사장님도 골반이 틀어지신 것 같은데. 이게 요즘 사람들은 대개 골반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사장님은 좀 심한 거 같아요. 젊어서 고생을 하셨나. 허허허."


아주 청산유수였다. 저렇게 많은 말을 그동안 어떻게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었는지 신기했다. 사장은 중간 중간 적절하게 대꾸를 해가면서 김공식의 말을 들었다.


정말로 재미있어서 듣는 것인지, 그냥 사람 좋은 척하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말을 하면 경청을 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금언을 지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왜 내 전화는 자꾸 끊었는지 묻고 싶었다. 카운터에 줄이 생길 정도로 손님이 몰릴 때도 사장과 김공식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공식의 장광설은 계속됐다.


"제가 또 우리 아파트 반장 아닙니까. 자기 자랑 같아서 좀 그렇지만, 우리 아파트가 아주 단결이 잘 돼요. 반장 잘 뽑아서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러는데, 허허. 지난달에도 아파트 사람들끼리 모여서 지리산에 다녀왔거든요. 우리 애들도 같이 갔는데, 우리 딸내미가 다리 아프다고 얼마나 칭얼거리던지. 그런데 우리 딸이 또 워낙 이쁘니까 사람들이 너도나도 업어주겠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우리 딸내미는 또 아빠 아니면 안 업힌다고 해서, 허허. 도시에 살다가 산속 좋은 공기 마시니까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요즘 입시에 찌든 아이들 보면 정말 가엾어요. 애들한테는 이 뭐냐 전인교육을 시켜야 되는데. 페스탈로찌도 그랬잖아요. 그 유명한 뇌과학자 아닙니까, 페스탈로찌. 그 사람이 그 뭐냐, 좌뇌, 우뇌 골고루 키워줘야 전인교육이 된다고 했죠. 왼손잡이가 사실 되게 좋은 건데, 부모들이 자꾸 왼손 쓰면 혼내고 그러니까 애들이 좌뇌 발달이 안 돼요. 왼손을 자유롭게 쓰게 해줘야 좌뇌 발달이 돼서 창의력이 쑥쑥 키워지는데. 허허"


이 시점에서 사장이 조금 끼어들었다. 왼손을 쓰면 우뇌가 발달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김공식이 펄쩍 뛰었다.


"아유 사장님 뭘 잘 모르시네. 이게 뇌가 척수를 지나면서 교차를 해서 좌뇌는 오른쪽으로 가고 우뇌는 왼쪽으로 가요. 그러니까 왼손을 열심히 쓰다 보면 우뇌가 자극받고 발달하고 그러는 거죠. 이게 다 유명한 뇌과학자 페스탈로찌가 밝혀낸 건데. 허허."


사장이 다시 말했다. 왼손이 우뇌와 연결된다는 것이 자기가 말한 거고, 김공식은 오히려 왼손이 좌뇌와 연결된다고 말했다고. 그랬더니 김공식이 또 펄쩍 뛰었다.


"아니 제가 언제 그랬어요. 사장님이 왼손이 좌뇌랑 연결되었다고 해서 제가 고쳐드린 거잖아요. 사람들이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왼손이니까 좌, 그래서 좌뇌와 연결되었다고. 그게 아니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뇌가 이 목 부분을 지나면서 양쪽이 교차한다니까요. 이게 다 그 유명한 뇌과학자 페스탈로찌가..."


"페스탈로찌는 교육학자 아닙니까?" 사장이 듣다못해 말을 끊었다.


"네, 교육학자요. 이게 다 그 유명한 교육학자인 페스탈로찌가 밝혀낸 거잖아요."


"교육학자가 뇌 연구도 합니까?"


"당연하죠. 그것도 모르셨나 보네, 허허. 그래서 암튼 우리 애들은 제가 터치를 안 해요. 자유롭게 창의력을 계발해야죠. 애들은 다 천재로 태어나는 건데, 그걸 부모가 망치는 거잖아요. 암튼 우리 아들은 엄청난 축구 선수가 될 거예요. 벌써부터 학교 선생님이 아주 칭찬에 입이 말라요. 우리 아들 나중에 크면 우리나라 월드컵 우승합니다. 나도 우리나라 축구 발전에 기여하려면 도사님에게 배운 비법으로 우리 아들 혈 자리를 좀 더 뚫어줘야 하나, 허허."


***


그 다음 주 사장의 순찰은 아침 이른 시간이었다. 여섯 시쯤 도착해서 김공식의 침술 강의를 30분 정도 들었을 때, 생수 배달 차량이 도착했다. 그날은 정말로 생수가 딱 떨어져서, 사장이 직접 생수를 40팩이나 주문했다. 배달 직원이 생수를 내려놓는 동안, 나는 담배와 커피를 사러 온 대학생 손님을 맞고 있었다.


사장이 김공식에게 말했다. "오늘 생수 옮길 게 좀 많네요. 저도 도울 테니까 좀 같이 옮길까요?"


"네?"


"보니까 생수가 딱 떨어져서 오늘은 좀 많이 시켰어요. 여기 열 개만 쌓고, 나머지는 안으로 옮기죠."


"아, 사장님. 제가 팔에 힘이 안 들어가서. 나이가 나이다 보니 삭신이 쑤시네요. 오늘은 좀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허허."


사장이 김공식보다 열 살은 더 먹었다. 가짜 웃음을 지어내면서 자기 팔을 주무르는 김공식을 뒤로 하고, 사장은 가게로 들어와서 내게 생수를 같이 옮기자고 했다. 생수를 다 옮기고 나서, 사장은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뜻이리라.


이번달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겠다고, 그러니까 밤 시간대 근무할 알바 알아보시라고, 이미 사장에게 말한 뒤였다. 말로 듣는 것과 직접 겪어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사장도 이제 알 만큼 알았을 터였다. 그러라고 밤 시간대 순찰을 부탁한 것이었다.


며칠 뒤, 김공식은 가게를 나서는 나의 가벼운 발걸음을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대신할 대타를 아직 구하지 못한 사장이 그날 내 자리에서 김공식과 가게를 함께 지킬 상황이었다. 사장은 무슨 사정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정해진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가게에 나타나지 않았다. 우울한 표정의 김공식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사장님 오실 때까지만 자리를 지키지."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문밖으로 나서는 내 뒤로 그의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살면서 그렇게 능동적인 결정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를 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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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벌써 5년 전이다. 나는 어느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그런데 블록체인을 연구하는 그 기업이 대기업에 인수되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대기업 사원이 되었다. 살면서 내가 이룬 것이 모두 내 덕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지 않는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게 순전히 그 한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악한 행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행위자를 벌하는 것은 고장 난 자동차에 채찍을 휘두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위라고, 유전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말했다. 생물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에 불과하니,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러니 사람이 아니라 유전자를 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이 유전자 상호 간의 모든 상관관계를 전부 알아내고 통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유전자를 벌하는 것이 가능할까? 유전자를 벌하는 세상에는 선인, 악인이란 개념도 없으리라.


중용이라는 것이 사실은 가장 실천하기 어렵다. 회색분자, 회색지대가 나쁜 것이라고 배우지만 사실 세상은 회색으로 가득 차 있다. 흑백을 가리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더욱 흑백을 가리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가장 '흑'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김공식과의 만남도, 나는 이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은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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