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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Dec 02. 2022

내가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책을 읽고]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릴리펏의 소인들은 귀엽다. 그러나 계속 보고 있으면 그 작은 존재들이 얼마나 악랄한지를 깨닫고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소인국 사람들은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전쟁도 하지만, 내부 갈등도 심하다. 갈등하는 이유는 신발 높이에 관한 견해 차이다. 작품 배경은 1700년대. 그 시절, 진짜 그런 이유로 싸우고 서로 죽이던 인간들이 조선 땅에 있었다는 사실을 스위프트가 알았다면 어땠을까?



브롭딩낵의 거인들은 무시무시하다. 걸리버의 맨처음 생각도 잡아먹히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그러나 그들은 유럽인들보다 훨씬 문명적인 사람들이었다. 대인국 국왕은 화약 기술을 전해주겠다는 걸리버의 제안을 거부한다. 각종 발명품을 들고 찾아온 선교사들에게 강희제가 보였던 태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약으로 인한 잔인한 전쟁 방식에 대해 알게된 거인국 국왕은, 너희 인간들이야말로 작은 벌레들 중에서도 가장 악한 해충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보면 사회 성숙도는 개체 크기에 비례하는 듯하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은 휘넘들과의 만남에서 온다. 문명 발달 정도로 보면 휘넘은 미천할 정도다. 글씨조차 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걸리버는 휘넘의 땅에서 평생 살기를 바란다. 국가는 물론 가족도 버리고, 한 휘넘의 하인 내지 가축으로 평생 살기를 바란다. 이 정도로 그를 매료시킨 휘넘의 특징은 무엇일까?


휘넘국에서 추방당한 걸리버는 어떻게든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겠다는 계획이 틀어지고, 결국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가족들을 멀리한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내와 함께하는 식사를 견디는 정도다.


이 모든 것은, 야후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그가 맞닥뜨린 참을 수 없는 혐오 때문이다. 어쩌면 걸리버가 그 누구보다 혐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휘넘국에서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역겨워하지 않았던가. 


대인국에서 그는 인간 문명의 야만성을 깨달았다. 라퓨타와 주변 나라에서는 문명 발전의 한계를 보았다. 여기까지 걸리버가 발견한 인간 문명의 한계는, 매우 어렵겠지만 교정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휘넘국에서 그가 만난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한계다.


바로 이 엔딩 때문에, <걸리버 여행기>는 모험 소설이라 할 수 없다. 모험 소설이란 언제라도 속편이 나올 수 있다는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휘넘국에서 돌아온 걸리버는 다시는 여행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모험의 끝에 교훈을 얻는 것은 일상다반사겠지만, 걸리버에게 그것은 너무 가혹했다.



사족


이 글은 개인 걸리버가 여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휘넘 사회가 무조건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들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은) 우생학을 믿는 듯하고, 자식을 물건처럼 주고받으며, 야후를 절멸시키려고 한다. 휘넘 사회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 중에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조지 오웰도 있다.



사족2


대학생 때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가 한국 사회에 환멸을 느낀 적이 있다. 교통 신호도 안 지키고, 문을 잡아주지도 않는 문화. 휘넘국에서 돌아온 걸리버가 느꼈던 것이 비슷한 감정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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