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무엇인가
밀란 쿤데라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설가란 자기 생활이라는 집을 때려 부숴, 그 돌 조각으로써 소설이라는 집을 세우는 족속이다.
김윤식 교수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해설에서 인용한 말이다. 이 문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살펴보자. 신과 인간이 한 세상에 어울려 살던 시대의 장르가 서사시였다면, 신이 떠난 세상에서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인간에게 주어진 장르가 소설이다. 다시 말해, 소설이란 인간이 소외되면서 나타난 장르다.
교환가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본질적 가치가 위기에 놓인 장면이 시민사회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김윤식, 작품해설, 407쪽)
의미를 찾아 떠나는 주인공은 성공하지 못한다. 이미 세상은 의미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돈키호테>의 결말,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결말이라 김윤식 교수는 말한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이 미완성 작품이기는 하지만, 결말이 났어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내면성과 외부세계라는 이원성은 결국 주관성에 의해서만 극복 가능하다. 통일성은 주관적으로, 자기 삶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만 정립 가능하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김윤식은 '남에게 받아쓰게 할 수 없는 기억'이라는 경구로 소설을 정의한다. 이 구절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받아쓰게 할 수 있겠지만, 콩트르 스카르프 광장에 대한 일은 받아쓰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킬리만자로의 눈>)
남에게 받아쓰게 할 수 있는 기억과 그럴 수 없는 기억을 대비시키면서, 헤밍웨이는 남이 받아쓸 수 없는 기억만이 소설이라 말한다는 것이 김윤식의 설명이다. 이어, 그는 오정희의 <유년의 뜰>과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의 구절들을, 받아쓸 수 없는 기억의 사례로 제시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윤식은 기억으로서의 소설이 소설의 순종 혈통임을 주장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컴퓨터에 의해 침식된 90년대가 참담하다고 말한다. '순종'이라는 말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일은 결코 없다. 나치와 일본 극우, KKK단이 쓰는 용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소설은 '묘사'다
김윤식은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자신과 박완서의 딸의 에피소드를 들며, 기억은 각자의 상상력일 따름으로 정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기억의 회고만이 "진짜 순종 소설의 혈통"이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면 기억만이 묘사를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책, 421쪽)
그냥 순종도 아니고 진짜 순종이며, 변함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단언은 오소독스를 넘어 도그마가 보이는 위험한 지경이다. 그러나 그런 감상은 뒤로하고, 김윤식의 명제 자체를 살펴보자.
1.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회고하는 것만이 소설의 순종 혈통이다.
2. 그 이유는 기억만이 묘사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2번 명제가 1번 명제의 이유인 것처럼 서술하고는 있지만, 알다시피 1번 명제의 이유는 이미 앞서 논의되었다. 즉, 교환가치가 본질을 가리는 시민사회에서 내면성과 외부세계의 통일은 오로지 한 개인의 주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로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회고하는 것만이 '진짜' 소설이다.
따라서 2번 명제는 1번 명제의 근거가 아니라 또 하나의 명제일 뿐이다. 2번 명제를 살펴보자. 오로지 기억만이 묘사를 가능케 한다. 무슨 뜻일까? 우선, 묘사라는 단어를 오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번 명제는 곧바로 반박할 수 있다. 눈앞에 뭔가를 보면서 묘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묘사가 기억에 의존한 묘사보다 정확하다는 점은 대개 수긍할 것이다.
따라서 2번 명제에 나오는 묘사라는 단어는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묘사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몰시간적이다. 묘사란 순간의 포착이다. 그래서 시간적 흐름이 중요한 서술과는 다르다.
그런데 기억의 핵심 요소는 다름 아닌 시간적 흐름이다. 따라서 김윤식이 말하는 묘사란 단지 서술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의 기억에 의해 타인의 발언을 기록할 경우, 작가라면 필연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 그것. (같은 책, 423쪽)
시간적 요소가 배제될 수 없는 '발언'을 묘사의 사례로 제시하는 걸 보면, 확실하다.
문제는 같은 문단에서 김윤식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철학과도 시(단편)와도 다른 소설의 특질이란 묘사에 있지 않았던가. (같은 책, 423쪽)
철학이나 시는 그렇다 쳐도, 단편과 소설이 갈리는 지점이 묘사라고 하는 걸 보면, 비평가 김윤식이 사용하는 단어, '묘사'는 단지 서술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 단지 '묘사', 즉 서술이라면, 소설이 다른 종류의 서사 형태와 뭐가 다른지 의아할 뿐이다. 다시 소설의 정의로 돌아가보자. 명제 1과 2를 종합하면, 소설은 '기억을 회고하는 서술'이다.
미안하지만 그런 서사는 아주 예전부터 있어왔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모세5경, 단군 신화가 전부 그런 종류다. 소설과 다른 점은, 집단적 기억이라는 점뿐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중대한 차이점이다. 다시 말해, 루카치가 '근대'라고 말한 역사적 변곡점은 집단 기억이 더는 불가능한 시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본주의적 가치, 즉 교환가치가 그 무엇보다 중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사시의 시대에는 본질적 가치에 대해 컨센서스가 존재했다면, 근대 이후에는 교환가치에 대해서만 컨센서스가 존재한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내가 평생 읽은 책들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책들 중 하나다. 김윤식 교수 덕분에 다시 환기할 수 있어 좋았다.
다만, 나는 <소설의 이론>이 아주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김윤식 교수의 평론도 대단히 문학적이었다.
<소설의 이론>은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을 찬양하는 책이 아니다. 탄식하는 책이다. 서사시가 근대를 만나 타락한 것이 소설인데, 우리는 '초월적 실향상태(transcendental homelessness)'에서 발버둥치며 그 타락한 형식에 목맬 수밖에 없다.
그 타락한 형식에 적자와 서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게 무슨 소용인지 도저히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