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콜리니코프를 다시 만나다

[책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by 히말

내 중2병의 중심에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있었다. 적막한 밤 거리를 돌아다니며 라스콜리니코프의 심리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오래된 건물의 추레한 뒷면을 바라보며 라스콜리니코프가 살던 하숙집을 상상하기도 했다.


범인과 비범인. 물론 나라는 존재는 그중 후자에 속한다는 믿음. 평범하다 못해 지리멸렬한 범인에게 이런 매혹이 또 있을까.


대학 시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죄와 벌>은 버려졌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둘은 차원이 다른 작품이다. <죄와 벌>도 엄청난 걸작이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미완성 작품임에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고전들을 다시 읽는 와중에도 <죄와 벌>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다시 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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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자신이 비범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수용한다. 경찰에서 자수하는 장면에서 분명 그렇지만, 에필로그에서 더욱 확실하게 그렇게 한다. 소냐와의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수용한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은 수많은 장면에서 입증된다.


그중에서도 그의 마음을 끈 것은 꽃이었다. (1권 164쪽)


지금 당장 죽기보다는 그렇게 하고라도 살아 있는 편이 낫다! 그저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아 있고 싶다! (1권 444쪽)


바로 이 한 가지 점에서 그는 자기의 범죄를 인정했다. 끝까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자수했다는 그 한 가지 점에서만. (2권 779쪽)


이 소설의 서사는 큰 그림에서 톨스토이의 <부활>과 거의 같은 구도를 가지고 있다. 확인해 보니, 이 책은 1866년, <부활>은 1899년 처음 나왔다. 도스토예프스키 승.


도스토예프스키는 많은 작품에서 기독교를 부정하면서도 소설의 엔딩에서는 주인공이 종교적 용서를 받는 모습을 그린다. 이는 기독교를 사회적 변혁의 에너지로 인식하는 톨스토이와 전혀 다른 접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겹치는 모습이다. <죄와 벌>과 <부활>이 똑같은 엔딩을 가지고 있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다. 하나는 돌아온 탕아. 즉, 종교 밖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던 도스토예프스키적 캐릭터는 결국 실패하고 종교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해석이다. 식상하다.


두 번째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작가의 현실적 유연성 내지 재치. 다시 말해,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안전한 결말을 택했다는 해석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에는, <Retraction>에서 제프리 초서가 보여주었던 모습이 겹쳐진다. 지금까지 기독교적 도덕관에 어울리지 않는 세속적 이야기를 늘어놔서 죄송합니다, 회개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다시 한번 그 종교의 경직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a34e0136c41b459488d18554e7061fc0.jpg 제프리 초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 쪽이었을까. 나는 2번인 것 같다. 즉 사회에 사는 작가라는 사람으로서 매우 현실적인 타협을 한 것이다. 도박에 쓸 돈이 필요한 그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좋아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서두에서 밝혔 듯,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의 젊은 시절을 지배한 작가였고, 그 어떤 작가보다도 위대하다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판 발자크인 것이 사실이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썼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했던 말처럼, 신은 위대한 재능을 내려줄 때 인격까지 고려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전히 도스토예프스키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단지, 예전에 그는 내게 셰익스피어 정도를 빼면 아무도 감히 대적할 자가 없는 그런 경지의 작가였지만, 지금은 많은 위대한 작가들 중 하나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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