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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an 31. 2023

만족하는 삶 vs 행복한 삶

법륜 스님의 가르침은 행복한 삶 대신 만족하는 삶을 택하도록 이끈다. <감정이라는 세계>에서 레온 빈트샤이트가 주장하는 것도 행복 대신 만족감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행복은 분명 좋은 것이다. 그러나 행복감은 진폭의 꼭대기일 뿐이다. 반드시 되돌아 온다. 플러스의 감정 뒤에 느껴지는 0의 감정은 마이너스나 다름없다.


이 영원한 행복 사냥은 심리적으로는 쾌락의 쳇바퀴를 끊임없이 달리는 것과도 같다. 쾌락을 느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감정은 원래대로 돌아오고, 새로운 사냥이 시작된다. (레온 빈트샤이트, <감정이라는 세계>, 333쪽)


스님이나 수도사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박수 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추구하는 구도의 삶은 바로 그런 감정의 굴곡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니까.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챙김, 명상, 감정 다스리기 등등을 통해 현대인들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려 불행해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개의 사람들은 마이너스만을 없애고 싶을 뿐, 플러스는 남겨두고 싶어한다. 법륜 스님 말씀 대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c) 법륜 스님


오드리는 보스턴에서 사는 게 외롭지만 불행하지는 않다고 했다. 코빈은 지금처럼 혼자 사는 삶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 양치질을 하던 코빈은 갑자기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역류성 식도염이라 생각하고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부끄럽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오드리와 함께 있다 보니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피터 스왠슨, <Her Every Fear>, 278쪽)


코빈은 헨리라는 사이코패스와 엮이는 바람에 연인을 만들지 못한다. 그의 과거 연인들을 헨리가 쫓아다니며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드리와 잠깐 시간을 함께 보내며, 코빈은 자신의 <매우 만족스러운 삶>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 절감하고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오드리를 죽게 할 수는 없다.


코빈은 가끔씩 신문을 펼쳤다가 헨리 우드의 부고 기사를 발견하는 상상을 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대낮에 거리에서 오드리를 찾아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키스할 것이다. (위의 책, 286쪽)


아예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삶보다는, 사랑하고 헤어지는 고통을 맛본 삶이 낫다는 시와 노래가 넘쳐난다. 그러나 과연 진심일까? 잔잔한 삶보다 위아래로 출렁이는 삶이 더 나은 것일까?


많은 실험을 통해 사람은 행복보다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모두 있는 인생이 더 좋은 걸까.


잔잔한 바다를 못 견뎌하며 차라리 폭풍이 몰아치기를 바라는 중생의 어리석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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