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를 위하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사람들은 이 곡이 제대로 연주되는 것을 듣기보다 약 100배 이상 그것을 전자음으로 듣는다.
실제로 들어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망쳐놓은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교향곡 제9번 역시 남용되는 걸작이다.
환희의 송가 때문이다.
실제로 9번을 처음부터 듣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가당치 않지만, 사실 나는 환희의 송가 부분을 들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9번도 좋아하지만 역시 제일 좋아하는 것은 5번이다.
5번 역시 너무 유명해서 그 걸작성이 간과된다.
난 이 곡을 지금까지 딱 한 번 실황으로 들었다.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였다.
내 생애 최고의 음악 감상 경험 중 하나였다.
(비견할 것이라면 헬싱키에서 조성진 연주로 들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랄까. 이 곡은 더구나 내 인생 최애 음악이라서. 게다가 잊을 수 없는 1악장 중후반부 프렌치 혼의 그 삑사리...)
너무 흔해 빠져 말 그대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베토벤의 위대한 걸작들.
실제로 듣는 경험은 차원이 다른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베토벤에 열광하는 걸까?
***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고흐의 그림에 열광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고흐의 삶은 그 어떤 유명한 화가의 삶보다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편지를 읽다 보면, 오랜 친구를 다시 알게 되는 듯한 친근함을 느낀다.
베토벤도 마찬가지다.
베토벤처럼 굴곡진 삶을 살다간 음악가는 흔치 않다.
청력을 잃은 음악가라니, 이 얼마나 가혹한 신의 시련인가.
시력을 잃은 시인 존 밀턴, 그리고 손을 움직일 수 없게 된 화가 앙리 마티스가 떠오른다.
(마티스가 그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노랑색으로 터져버릴 것 같아도 음울함이 배어나는 고흐의 그림처럼,
베토벤의 음악은 아무리 밝은 부분이라도 그의 고뇌가 묻어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HljSXSm6v9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