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의 소설 제목이다. 한국 번역판은 제목을 <인생>으로 지은 것도 있지만, <살아간다는 것>으로 지은 것도 있다. 원어로는 <생착(셩쯔어)>인데, WOW의 영고생착이 생각나서 자꾸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최근에 한승태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 글 잘쓰는 사람은 차고 넘치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일 정도로 글을 잘 쓴다. 약간 움베르토 에코 느낌 나는데, 글이 찰지게 되는 데에는 역시 독설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일단, 너무 웃긴다.
그러나 웃기기만 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의 글은 끊임없는 자기 반성이다. 돈사에서 돼지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사람이라는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서 반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반말을 들으면서도 외국인 노동자에게만 화를 낸 자신의 한계에 대해 반성한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사람이, 이렇게 똑똑하고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 왜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는 걸까? 단지 글감을 얻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힘든 삶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주인공의 현신이라도 되는 건가.
위화의 <생착>은 훌륭한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딱히 더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보낸 중국인들의 삶이란, 타인인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삼체>라는 SF 소설에조차 등장하는, 문혁이라는 이름의 신의 악랄함은 수많은 사람들을 공평하게 할퀴었다.
반면, 롤스가 무지의 장막으로 가리고자 했던 태어날 때의 운빨 뽑기는 너무 불공평하다. <백야행>의 여주인공이 자신의 절친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말은, 역겨운 동시에 깊은 울림을 준다.
"나도 정상적인 가정에서 엄마 아빠 사랑받으면서 자랐다면 저 애랑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주인공이 겪는 고난은 픽션이 아니다. 찰스 디킨즈 본인이 어렸을 때 그런 고생을 했다. 단지 아버지가 빚을 못 갚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은 해피 엔딩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해피 엔딩 뒷편에는 다른 모든 인물들의 언해피 엔딩이 가려져 있다. 도저는 머나먼 호주 땅에 유배되었고, 낸시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맞아 죽었으며, 사이크스는 군중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죽었고, 페이긴은 교수형 당했다. 모두가 뽑기 운이 안 좋았던 사람들이다. 오직 올리버만이 앞면과 뒷면이 다른 내용인 운을 뽑았을 뿐이다.
홍길동은 서자의 설움을 울부짖었지만, 적어도 그는 밥을 굶지는 않았다. 만적은 노비 신분으로 반란 단체의 리더가 되었지만, 운 없이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노오력을 강요하는 것은 논리도 없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프로퍼갠더일 뿐이다. (더구나 만적도 스타르타쿠스도 언해피 엔딩이다.)
일드 <여왕의 교실>의 엔딩곡인 Exile의 <Exit>라는 곡이 있다. 그냥 들으면 무난하게 좋은 노래다. 그러나 가사가 어이없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금 저 모양인 이유를 알 것 같다.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리세또가 가능해 (いつでもどこにいてもリセットできる)
미친 게 틀림없다.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서사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리셋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