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Feb 07. 2023

테스, 세 번째 만남

[책을 읽고] 토머스 하디, <테스>

작가라기보다는 철학자라 불러야 할 토머스 하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테스>를 다시 읽었다. 학창 시절 처음 읽었고, 대학원 시절 다시 읽었으며, 이제야 다시 세 번째 방문이다.



알렉의 입장


하디는 알렉과 엔젤이라는 구도를 분명한 선악 구도로 정하고 이것을 무려 <서술>로 드러낸다. 알렉은 악인이다, 라고 직접 언급하는 부분이 여럿 있다. 알렉의 행위는 분명 죄이지만, 적어도 범죄는 아니다. 현대 법 체계 관점에서 보면, 아내를 방기한 엔젤 쪽에서 오히려 범죄가 성립한다.


알렉의 입장에서 테스의 이야기는 어떻게 그려질까 상상해보면,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알렉은 하디가 상정한 것처럼 그렇게 극단적인 악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스토킹이 범죄로 규정된 것은 십수 년 전에 겨우 일어난 일이며, 인류 역사 수천 년 동안 끈질긴 구애는 찬사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느낌의 동물이다. 안토니오 디마지오가 말하듯, 느낌은 심지어 자아의 확립에 선행한다. 느낌이 생각이나 결정에 선행한다는 사실은 실험에 의해 이미 확인된 것이다. 테스는 처음부터 알렉을 좋아하지 않았고, 사랑을 구걸하는 알렉에게 수 차례에 걸쳐 그렇게 이야기했다.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고 말이다. 


알렉에 대한 테스의 느낌은 동물적 혐오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것은 그녀가 그를 처음 본 순간 확립된 것이다. 관찰 결과가 아니라 그냥 첫 인상이다. 즉, 테스는 알렉의 외모를 혐오한 것이며, 그것은 알렉이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겠지만, 알렉과 테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결국 스토킹과 그에 대한 과잉방어로 나타난 살인일 뿐이다.



그러나 논점은 테스의 불행이다


하디가 묘사하고자 한 것은 그가 말하는 Immanent Will, 즉 인간 존재에 대해 무자비한 섭리적 폭력성이다.  그의 모든 소설이 이 주제만을 그리고 있다.


자신이 몰락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테스의 아버지가 듣게 된 것, 가족의 생계 수단인 말이 죽게 된 것, 그 죽음에 대해 테스가 책임감을 느낀 것, 우연히 더버빌이라는 이름을 훔친 벼락부자가 근처에 살게 된 것, 테스가 가짜 더버빌의 집에 찾아갔을 때 어머니가 아닌 알렉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 등이 모두 비극의 1막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Immanent Will이 실행한 가장 잔인한 장난이라면, 역시 테스의 고백 편지가 발판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엔젤이 그 편지를 읽지 못한 것이다. 테스의 과거를 나중에 알고 충격을 받은 엔젤은, 자신의 진면목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내가 당신을 용서했듯 날 용서해주세요. 당신은 용서받았잖아요. 엔젤.” 
“그래, 당신은 날 용서했어.”
“그런데 당신은 날 용서할 수가 없나요?”
“테스, 당신은 경우가 달라. 당신은 용서받을 수가 없어. 지금은 당신은 이미 예전의 당신이 아니오. 어떻게 용서라는 말이 그따위 괴상망측한 요술에 적용될 수가 있겠소.” (500쪽)


물론 엔젤은 선한 인물이 아니다. 단지 알렉과의 대립 구도에서만 그런 특성을 부여받을 뿐이다. 소설에 명시적으로 나와있듯, 알렉은 테스의 육체에, 엔젤은 테스의 정신에 폭력을 행했다. 하디가 그의 수많은 시에서 거듭해서 보여주듯,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무 죄 없는 테스라는 여자가 이유 없이 겪어야 하는 비극적 운명뿐이다.


비관주의를 진정성 있게 설파한 철학자는 토머스 하디뿐이다. 인생 그 자체가 비극인 상황에 해결책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하디가 불교 철학을 알았다면, 뭐가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2월 첫째 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