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로버트 실러, <내러티브 경제학>
일단 까고 보자
거창한 서두, 배신의 본문, 그러나 시도는 좋았다. 이 책의 취지에 대해 저자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간단히 평하려고 해도 자꾸 단서를 붙이게 되는데, 이 책 자체가 그렇다. 자꾸 단서가 붙어야 핑계라도 댈 수 있는 그런 책. 애초에 존재 의의가 별로 없는 그런 책.
결론적으로, 이 책은 <내러티브 경제학>에 대한 어떤 토대도 놓지 않았다. 그 단어를 만든 정도의 공은 인정해 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프로퀘스트랑 구글 트렌드로 뚝딱 찍어낸 느낌의 책이다. 특히 제8장, <내러티브 경제학의 7가지 기본 명제>는 그냥 웃음밖에 안 나온다. 아무말 대잔치가 명제라니. (하긴 뭐 명제의 정의를 생각해보면 아무말이나 다 명제이기는 하다.)
부록에 나오는 역학 방법론 논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장 간단한 모형은 수학적으로 설명하고, 내러티브 전염의 경우 변수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말만 하면 끝내면 뭐 어쩌라는 건가? 재감염은커녕, 사망이나 격리조차 전혀 고려하지 않는 SIR 모형은 수학적으로 설명하고 (그래봤자 1차 도함수 설명한 게 다다), 역학 모형을 내러티브에 적용하려면 추가해야 하는 변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짐을 설명하는 데서 그친다.
팩트 체크도 아쉬운 데가 몇 군데 있다. 특히, 비트코인이 RSA에서 탄생했다는 희한한 주장은 어이가 없다. 아마 RSA에 대해서도 안다는 젠체를 하고 싶었던 듯. 챗GPT한테 물어보니 비트코인 초기 배포에 RSA가 사용되었다고는 하니, 아예 관련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비트코인의 보안은 RSA와 같은 N<>NP 상황, 즉 문제해결과 검산의 난이도가 전혀 다른 상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원장이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반하는, 전혀 다른 성격의 보안이다. 비유하자면, 태양광 에너지가 정유 기술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9가지 내러티브 이야기는 그냥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래도 좋았던 점들
그러나 이 책에는 좋은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내러티브'라서 그런가.)
IMF는 1988년 이후 194개국에서 도합 469번 경기침체를 예측했으나, 실제로 17번만 맞았다. (17쪽)
IMF가 어떤 조직인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 통계다.
다음은 체스 그랜드마스터 개리 카스파로프가 한 말을 저자가 인용한 것이다.
선수들마저도 체스 게임을 일종의 이야기로, 즉 기승전결이 있는 하나의 내러티브로 보는 함정에 빠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야기의 끝에는 도덕적 교훈도 있다. (102쪽)
개리 카스파로프가 쓴 책을 예전에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천재 느낌이 나는 사람이었다. 내러티브의 본질을 통찰하는 이 한마디도 대단하다.
다음은 이 책 읽다가 만난 웃기는 이야기.
한 러시아인이 자동차를 사려고 대리점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언제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10년 후라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오전인지 오후인지 되물었다. 직원이 말했다. 10년 후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그러자 남자가 대답했다. "오전에는 배관공이 오거든요." (135쪽)
비트코인 내러티브가 금본위제 논란과 유사하다는 주장은 동의한다. 화폐의 권원에 대한 논란이니까 말이다. 물론 나는 19세기 후반에 복본위제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금본위제 대 복본위제의 내러티브는 역사적으로 매우 격렬한 사회 분열을 초래했으며, 그런 점에서 최근 암호화폐와 상당히 유사하다. (349쪽)
기술에 의한 일자리 대체 내러티브도 의외로 역사가 길다.
아리스토텔레서는 기원전 350년 무렵,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가능성에 대해 제시했다. (386쪽)
대공황이 최악에 치달았던 1933년에는 아인슈타인도 기술 진보가 대공황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한다.
신기술과 체계화를 통한 생산기계의 발전은 인간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켰고 그로써 경제 회로에서 노동력의 일부를 제거했다. 그 결과 소비자의 구매력은 꾸준히 감소되었다. (421쪽)
1차 대전 이후 최악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던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미국 때문이라 생각했다 한다. 어빙 피셔는 독일을 방문하고 나서 이렇게 썼다.
독일인들은 물가가 오르는 이유가 미국의 금 달러가 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가 전세계의 금을 독점하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5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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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로버트 실러. 혹시나 해서 검색해보니 201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케이스-실러 주택가격지수의 그 실러 맞다. 허걸걸. 책을 쓰지 말든가. 경제학상이 다른 노벨상에 비해 좀 저렴해 보이는 게 다 이유가 있다.
사족 둘.
그런데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이 유진 파마 교수랑 공동 수상이다. 파마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듯. 케이스-실러보다는 파마-프렌치가 더 유명하잖아? (그런데 뭐 어쩌겠어, 경제학상인데.)
사족 셋.
약간 팔을 비틀어 실토하게 한 느낌도 있지만, 챗GPT도 파마가 실러보다 유명하다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사족 넷.
책을 중간까지 읽을 때까지도 나는 저자 이름을 보지 않았다. 저자가 로버트 실러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박한 평가를 내렸을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저자한테 실망한 게 아니라, 거창한 제목에 실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