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폴 블룸, <최선의 고통> (2)
폴 블룸의 책, <최선의 고통>에 대해서는 이미 서평을 썼다. 내가 왜 그의 결론에 수긍하지 못하는지가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의 책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은 인정한다. 밑줄 친 부분을 하나하나 되읽으며 음미하고, 내 생각을 더해보는 경험은 그의 말대로,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그런 수많은 밑줄 중 하나만은 별도로 생각해보기 위해 남겨두었다.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의식적 경험이 있다. 삶을 살아가는 경험자, 그리고 삶에 대해 판정하고 실망하는 관찰자다. (436쪽)
우스운 책이지만, 질 테일러의 <Whole Brain Living>에 나오는 제2 캐릭터와 제3 캐릭터가 이들에게 대응한다. 경험자는 그 순간을 산다. 반면, 관찰자는 경험 하나하나에 자의식을 들이대며 괴로워한다. 붓다가 없애려 한 것이 바로 이 관찰자다. 명상의 목적도 같다. 뇌경색으로 쓰러지던 질 테일러의 자의식에서 순간 날아가버린 것도 바로 이 관찰자다. 그녀는 그 순간 충만한 행복감에 도취되었다고 말한다.
폴 블룸은 복합적인 의미에서 서양인이다. 더는 명상을 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생각을 끄는 데 명상보다 팟캐스트가 낫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는 분명 관찰자의 끝없는 투덜거림을 없애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라는 관찰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안네 프랑크가 말하는 <꼬마 모순 덩어리>의 재등장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와 돼지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39쪽)
폴 블룸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이 발언은 그냥 커다란 에고가 존재함을 자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에고는 적이다>라는 책을 써서 부와 명성을 얻어 배부른 소크라테스, 아니 배부른 돼지가 되어 버린 라이언 홀리데이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나는 폴 블룸의 전작, <공감의 배신>도 감명 깊게 읽었고, 이 책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라이언 홀리데이와 같은 장사꾼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