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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r 15. 2023

행복보다 의미를 추구하라고?

[책을 읽고] 폴 블룸, <최선의 고통> (1)

이 책의 저자는 <공감의 배신>을 쓴 폴 블룸이다. 전작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폴 블룸은 생각의 깊이가 남다른 작가다. 많은 책을 읽고, 그걸 자신만의 생각으로 녹여 책을 쓴다. 다만, 이전의 책과 마찬가지로, 정연하고 치열한 사고의 과정에 비해 결론은 뭔가 불완전한 느낌을 준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 때문일까.



이 책의 결론은 단순하다. 행복한 삶보다 의미 있는 삶이 더 값진 것이며,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선택적 고난, 즉 스스로 선택한 고난을 받아들여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진가는 결론이 아니라 생각의 과정에 있다. 그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반박할 것은 반박하면서,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는 건 어떨까.


행복한 사람은 건강하고 재정적으로 넉넉하고 많은 쾌락을 누리며 사는 경향이 있다.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삶은 더 많은 불안과 걱정에 시달린다. (10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 대신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독설가인 나는 이런 대답이 떠오른다. 행복보다 의미 찾기가 더 쉽기 떄문이다.


이제 나는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때 명상을 하지 않는다. 대신 팟캐스트를 듣는다. 타인의 목소리에는 머릿속에서 자의식을 끌어내고 마침내 내면의 '나, 나, 나'를 차단하는 자동적인 끌림이 있다. (141쪽)


이것은 내 경험과도 일치한다. 명상은 그 목적이 분명히 생각의 차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생각을 끌어들인다. 반면, 타인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나 또한 오디오북을 들으며 위안을 얻는다.


긍정적인 환상은 실제 목표로부터 한눈을 팔게 만든다. 긍정적인 환상은 대체재로 기능한다. (231쪽)


슬픈 현실이지만, 그렇다. 시지프스도 머릿속으로는 퀘스트를 끝내고 보상을 받는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칙센트미하이는 직업이 몰입의 주된 원천이라 강조했다. 그가 책을 쓴 30여 년 전에는 맞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틀릴 수 있다. 설문조사에서 자신이 참여형 근로자라 밝힌 사람은 13%에 불과했고, 63%가 이탈형, 그리고 무려 24%가 적극 이탈형 근로자라고 밝혔다. (293-294쪽)


이탈형은 일에 열의가 없고, 적극 이탈형은 심지어 회사에 해를 끼치고자 하는 근로자를 말한다. 이 시대에 마르크스를 들먹이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소외의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도 자기계발서들은 30여 년 전의 어떤 책을 들먹이며 일에 몰입하라 채찍질한다.


이 책에는 행복하기만 한 삶을 인간이 거부한다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하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오로지 행복 추구만이 인간의 목적인 세상을, 주인공은 거부한다. 또 하나는 영화 <매트릭스>다. 최초의 매트릭스는 완벽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설계되었으나, 인간들이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물론, <매트릭스>는 헉슬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모든 디스토피아 서사가 그래왔듯이.


이는 책에 인용된, <나의 투쟁>에 대한 조지 오웰의 서평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좋은 시간을 제공하겠소"라고 말한 반면, 히틀러는 "고난과 위험 그리고 죽음을 제공하겠소"라고 말했다. 그 결과 나라 전체가 그의 발밑에 엎드렸다. (319쪽)


또다시 조지 오웰의 천재성에 놀라는 건 잠깐 옆에 두고, 생각해보자. 가볍기만 한 내 의견이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히틀러가 독일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반면, 그는 독재와 규율은 줄 수 있었다. 독일인들은 생각하는 역할을 히틀러에게 맡겼고, 그가 제공하는 <의미>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치의 범죄는 단지 나치의 범죄가 아니라 독일인 전체의 범죄인 것이다. (나는 프리모 레비를 만나기 전까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의미 있는 삶에는 고난이 수반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고난을 선택해야 한다고 블룸은 말한다. 그리고 의미를 위해 고난을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사례로 종교를 든다. 심지어 조너선 하이트를 인용하면서.


나는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이 역작이라 생각하지만,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인 소위 <우파>를 이해하기 위해 그 책을 썼고, 자신이 책을 쓰면서 그들을 이해했다고 착각했다. (다분히 고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권위나 전통이 어떻게 도덕 기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대목에서 폴 블룸은 조너선 하이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논증을 통해 자기가 주장하려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견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종교보다 더 큰 해악을 끼친 문화 현상은 없다. 단순히 계산해도, 종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어떤 것은 없다. 나치즘 역시 종교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향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우리는 행복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진화는 우리가 고통 없이 살기를 원치 않는 만큼, 끝없는 환희 속에 살기를 원치 않는다. 고통은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정보이자 상황을 개선하도록 만드는 유도책이다. (421쪽)


이것은 단순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지만, 대단한 통찰을 보여준다. 진화라는 과학적 기준에서 볼 때, 행복 추구는 인간 존재에게 적절한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스티븐 울프람이 <인공지능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에서 제시한 주제, 즉 이 우주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스티븐 울프람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반면, 폴 블룸은 대답한다. 정말 대담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폴 블룸의 대답을 인정할 수 없다. 의미의 추구, 특히 집단 차원에서 의미를 추구한 많은 경우가 전쟁과 살육으로 이어졌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합은 커다란 교집합을 이룬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히틀러 치하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람들의 식량을 훔쳐 잘 살던 독일인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아주 중요한 의미, 즉 독일인의 숙명에 기여하며 충만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The Sweet Spot>이다. 스윗 스팟은 대개 균형을 의미한다. 그런데 책의 결론은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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