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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r 26. 2023

시간은 흐르는가

[책을 읽고] 김필영, <시간여행>

제목은 시간여행이지만, 시간의 본질에 관한 책이다. 시간의 본질에 관한 주장은 다양하다. 그래서 책은 일단 이들 주장을 크게 두 개로 묶고 논의를 시작한다. 


3차원주의 - 1)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며, 오직 현재만 존재한다. 2) 현재는 미래로 끊임없이 나아간다. 3) 세계 속의 개별자는 시간을 뚫고 존재한다.


4차원주의 - 1) 과거, 미래 역시 현재와 똑같이 존재한다. 2) 현재가 미래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다. 3) 세계 속의 개별자는 시간에 걸쳐 존재한다.


시간여행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고, 논의도 신통치 않다. 분석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는 시간여행자의 개별시간과 외부시간이 일치하지 않는 여행이라고 정의했다는데, 이런 정의라면 세상에 시간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일반상대성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당연하다.


현대물리학에서는 고리형 시간여행만이 가능하다고 대체로 동의한다. 민코프스키 식으로 시공간을 그려보자. 예컨대 X축은 공간, Y축은 시간으로 간단히 2차원 시공간을 그려본다. 가만히 있으면 그 사람은 X축의 한 지점에 머문 채로 Y축을 따라 미래로 움직인다. 그러나 공간축을 상당히 빠르게 달린다면, 시간 방향에서 상당히 이탈할 수 있다. 이 상태로 운동을 지속하면 시공간 평면에 폐곡선을 그릴 수 있다. 고리형 시간여행이다. 그러니까 빠른 탈것을 타고 마구 이동하다보면 과거 어느 시점의 시공간에 도착할 수 있다. 이걸 반복하면 영생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생이 과연 살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과거로 돌아갔다 하나, 여전히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의 몸은 엔트로피를 거스르며 열심히 대사활동을 지속해야 할 것이고, 그게 영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코프스키


3차원주의 대 4차원주의


책의 다음 부분은 앞에서 말한 3차원주의와 4차원주의에 관한 그간의 논쟁을 다룬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시간이 3차원주의고, 4차원주의는 카를로 로벨리나 줄리안 바버가 주장할 만한 생각이다. 즉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문제는 이거다. 책에 소개된 시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은 거의 모두가 논리학적인 것들이다. 시쳇말로 말장난이다. 예컨대 맥타가트의 A-시간론과 B-시간론은 허점이 너무 많아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안 생긴다. 이런 말장난이 기원전 5세기 그리스가 아니라 현대에 벌어졌다는 것이 당혹스럽다. A-시간과 B-시간에 관한 논증에서는 한우진이 가장 타당한 결론을 내린 듯하다. 즉, 맥타가트 논증의 결론은 ~A V ~B, 즉 A-시간이 존재하지 않거나 B-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제주의와 무시제주의에 관한 것은 그나마 조금 유용성이 있다. 논리실증주의가 주장하는 바, 즉 진리값과 무관한 명제들을 걷어내자는 차원에서 쓸모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이 주장이 귀를 기울여볼 가치도 없는 자기도취적 허풍이라고 생각한다.) 


포인트는 시제주의적 문장을 무시제주의적 문장으로 바꿔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논쟁 역시 논쟁 자체로는 흥미롭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쓸모가 없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아주 잘 설명하고 있듯이, 언어에는 세계에 대한 기술 외에도 아주 많은 용도가 있으며, 인간은 사실 그 둘을 잘 구별하지도 못한다. "치과 치료가 끝나서 정말로 다행이다"라는 문장에 관한 논쟁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현재주의와 영원주의의 대립을 다룬다. 형이상학자들이 시간에 관한 네 개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저자가 말하듯이 본질적인 질문은 시간이 흐르는가 여부이고, 이에 따라 네개의 주장은 현재주의 대 영원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관한 논의에 시간의 화살, 즉 엔트로피가 빠질 수 없다. 시간의 화살은 엔트로피 증가, 즉 열역학 제2법칙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통계적 진실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더 하는 것은 <시간여행>이라는 책에 대한 서평이 아니므로 그만두겠다.) 


이 장에서는 현대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화살 이상의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이 인간의 감각적 한계 때문일  있다는 배리 데인튼의 한마디는 생각해  여지를 남긴다.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수확이다.) 다만, 이 주장이 과거와 미래도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고 한다면, 그건 성급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 주장에 따르면, 현재는 감각으로, 과거와 미래는 추론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인데, 감각의 한계를 주장하면서 추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생각에, 인류는 아직도 유아론을 반박하지 못했다.


다음 이야기는 이동지속이론과 찰나지속이론의 대립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변화하면 이미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일성이라는 것을 유지하면서도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과 부합한다. 이와 관련, 저자는 라이프니츠의 동일자 구별불가능성 정리(Principle of Indiscernability of Identicals, 이하 PII)를 소개한다. 간단히 말해, 속성이 다르다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렸을 때와 어른일 때는 속성이 많이 다르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 상식이고, 이동지속이론의 입장이다. 즉 PII를 동시에 존재하는 개별자에게만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에 대해, 찰나지속이론은 어린 마이클 잭슨과 어른 마이클 잭슨이 다른 사람이라는 입장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린 마이클 잭슨과 어른 마이클 잭슨이 서로에 대해 상대역(counterpart) 관계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크립키의 <가능 세계>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팔이 네 개인 백범 김구는 가능하지 않지만, 대통령 김구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암살된 김구와 대통령 김구는 가능세계 관점에서 서로에게 상대역 관계다. 어린 마이클과 어른 마이클도 이런 식으로 가능한 개별자들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찰나지속이론은 결과적으로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장은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로렌츠 해석과 민코프스키 해석의 대립을 다룬다. 나는 특수상대성이론은 로렌츠 해석으로, 일반상대성이론은 민코프스키 해석으로 (책을 읽어서) 배웠다. 그래서 두 개가 서로 대립된다고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로렌츠 해석은 기존의 시간론, 즉 3차원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 



3차원주의를 위하여


이 책의 본 게임은 그 다음이다. 저자가 3차원주의를 옹호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현재 4차원주의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 말하지만, 3차원주의는 직관적이라는 점에 있어 분명 장점이 있다. 따라서 3차원주의는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보편시간을 가지는 관계적 3차원주의>다. 간단히 설명하면, 기존의 3차원주의에서 절대시간을 보편시간으로 대체한 것이다. 보편시(공)간은 뉴턴의 절대 공간과 라이프니츠의 관계적 공간을 절충한 것이다. 뉴턴의 공간이 절대좌표계와 같은 것이라면, 라이프니츠의 공간은 물체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보편공간은 이 둘을 절충한 것이다. 절대좌표계는 아니지만, 물체들이 몽땅 없어진 우주에도 공간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을 시(공)간으로 대입하면 보편시간이 성립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추가한다. 물자체를 구성적으로 지각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감안하면, 칸트에게 시간이란 감각자료를 받아들이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3차원주의에 칸트가 필요한 이유를, 시공간의 실재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현상계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고, 물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시공간은 우리가 물자체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즉 현상계의 개념이다. 따라서 시공간은 물자체는 아니지만 어쨌든 실존한다.


이 부분의 설명이 다소 아쉬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칸트 인식론 자체가 가지는 모호성 때문이다. 틸리는 <서양철학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틸리를 굳이 들먹이는 이유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틸리를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긴, 칸트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면 현상학이 왜 나왔겠는가?)


칸트는 경험에 대한 자신의 시초적 분석이 철저하다는 가정에서 진행한다. 그러나 이는 물론 완벽하게 근거 없는 것이다. (<틸리 서양철학사>, 제16장, 1036쪽)


내 생각에, 칸트 철학은 프로이트의 소위 정신분석학 만큼이나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내적일관성(coherence)만 있을 뿐, 세계와의 상관성(correspondence)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론의 역사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는 데이터의 입력, 즉 우리 감각의 제한성을 늘 지적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은 여러 가지 탐지 장치를 동원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데이터의 양을 늘려왔다. 인간의 육체는 가시광선만을 보고 가청주파수만을 듣지만, 현대 기술은 모든 주파수의 전자기파를 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현상계는 칸트 시절의 현상계보다 훨씬 더 물자체의 세계에 다가가 있다. (물론 그것마저 <매트릭스>와 같은 허구일 수 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다. 다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자. 칸트가 굳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에, 저자는 칸트를 빌어와야 메타적 질문의 끝없는 연쇄를 차단할 수 있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공간이 물자체가 아닌 현상계의 개념이라고 설명하는 쪽이 더 직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고실험에 보편시간 투척


특수상대성 이론의 로렌츠 해석에 등장하는 시간지연/길이수축은 물리적 현상인지 좌표적 현상인지를 생각해보자. 이것이 단지 좌표적 현상이라면, 로렌츠 해석은 그냥 말뿐인 것이므로, 4차원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이 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이라면 3차원주의를 지지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존 스튜어트 벨의 사고실험을 생각해보자. (EPR논쟁을 끝내버린 바로 그 벨이다.) 이 사고실험을 제안한 것은 벨이 아니지만, 벨로 인해 유명해졌으니 벨의 사고실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모양과 크기가 같은 두 개의 우주선이 팽팽한 줄로 연결되어 하늘에 정지해 있다고 하자. 이때 두 우주선이 동시에 똑같은 가속도로 출발한다면 두 우주선 사이에 연결된 줄은 끊어질까. (452쪽)


벨은 CERN 재직 당시 어떤 유명한 과학자와 내기를 했는데, 자신은 끊어진다고 주장했고, 상대는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벨은 스스로 패배를 자인했다고 하는데, 많은 물리학자들이 줄이 끊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결국 벨이 옳았던 것이다. (스티븐 호킹과 킵 쏜의 내기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호킹이 패배를 자인했으니, 후세에는 호킹이 옳았다고 증명될까? 그런데 그렇다면 정말로 정보가 증발된다는 이야기인데...)


이 사고실험에 대한 마쓰다와 키노시타의 증명을 보자. 지구의 관점에서 볼 때, 두 우주선은 동시에 같은 가속도로 출발했으므로 우주선 사이의 거리는 출발 후에도 그대로다. 그러나 가속도 때문에 발생한 길이수축으로 인해 두 우주선을 연결한 줄의 길이는 수축한다. 따라서 줄이 끊어진다.


그런데 줄이 끊어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줄과 함께 두 우주선 사이의 공간도 수축했다면, 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공간은 물체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이들과 별도로 존재하는 실체다. 이것을 보편공간이라 부르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쌍둥이 사고실험


쌍둥이 역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쌍둥이 중 한 명은 지구에 남고, 나머지 한 명이 매우 빠른 속도로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여행한 쪽이 더 젊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론적 입장에서 보면, 지구에 남은 쌍둥이도 우주여행한 쌍둥이에 대해 상대적으로 운동을 한 셈이다. 그런데 왜 우주여행 쪽이 더 젊어야 하느냐는 것이 역설의 질문이다. 이에 대해 일반적인 대답은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라, 가속도(=중력장)의 영향을 받은 쪽의 시간이 덜 흘렀고, 그래서 더 젊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해설은 문제가 있다. 저자의 말대로, 특수상대성에 따른 시간지연을 왜 일반상대성의 중력장으로 설명하냐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 역설에 대해 답은 없다는 점이다.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자. 쌍둥이 역설의 기본 상황을 시나리오 1이라고 이름 붙이자. 시나리오 2는 이렇다. 우주선에 탄 쌍둥이 1이 제자리에 있고, 지구와 쌍둥이 2를 포함한 나머지 우주 전체가 반대 방향으로 운동을 하고 되돌아오는 것이다. 시나리오 2의 결과가 시나리오 1과 같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수긍이 된다. 


시나리오 3을 보자. 우주 전체에 쌍둥이 1과 2만 있는 경우다. 쌍둥이 1이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라면 상대적으로 운동을 한 것이 쌍둥이 1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둘은 서로에 대해, 내지는 둘이 만드는 <보편 공간>에 대해 운동을 한 것이고, 시간 지연은 똑같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 지연이 일어났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시간 지연은 <무엇에 대해> 일어난 것인가? 저자는 보편 시간에 대해 시간 지연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것이 보편 시간의 존재 증명이다. 보편 시간이 존재한다면, 전 우주에 걸쳐 보편적인 현재라는 것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증명 끝.


납득이 되는가? 나는 안 된다. 시나리오 3에서 시간 지연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으로밖에는 안 들린다. 저자는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보편 시간은 말하자면 일종의 평균값이라고 말한다. 6명이 100미터 달리기를 해서, 10, 12, 14, 16, 18, 20초 기록을 세웠다면, 평균 기록은 15초다. 그것에 비해 각각 -5, -3, -1, +1, +3, +5초의 편차가 나타난 것이다. 아무도 15초의 기록을 세우지 않았지만, 15초라는 기준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좌표와 뭐가 다른가? 절대 좌표가 아닐 뿐이다.


AI 작, <시간의 화살>


소결


스릴 넘치는 라이드였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해답은 없었다. 당연하다. 해답이 나왔다면 세계적으로 대서특필되었을 테니까.


나는 이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즐겼고, 저자의 <철학하기>를 보며 경탄했다. 칸트에 대해 내가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에 칸트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다.


시간이란 주제는 내가 정말 애정하는 주제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었고, 카를로 로벨리가 내게 조금 특별한 과학자인 이유는 그의 시간관 때문이다. 줄리안 바버라는, 이름도 생소한 학자를 내가 기억하는 이유는 그의 플라토니아 개념 때문이다.


과학 개념이 많이 나오지만, 이 책은 과학책은 아니다. 예컨대, 다음 표현은 시간의 화살, 즉 열역학 제2법칙을 오해하고 있다.


맥스웰은 3차원주의에 대한 첫 번째 근거로서 자연의 인과법칙을 제시하였다. (508쪽)


시간의 화살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다른 모든 물리법칙과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화살을 제외한 모든 물리법칙은 시간축에 대해 대칭적이다. 즉, 몰시간적이다. 시간의 화살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시간과 관련한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그런데 위의 주장을 3단 논법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과 법칙이 존재한다.

2) 인과 법칙이 존재하려면 시간의 화살이 필요하다.

3) 그러므로, 시간의 화살은 존재한다.


보다시피, 순환논법이다. 인과법칙이란 시간의 화살의 다른 이름이다. 법칙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게 왜 존재하는지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저자 식으로 설명하자면, 시간의 화살에 대해서는 구성적 이론(construction theory)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원리적 이론(theory of principle)만이 존재할 뿐이다.


세상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너무 많다. 늦게라도 배움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중이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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