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권 자기 혁명]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2007년, 영국 맨체스터. 열 살 소년이 자기 이복누이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나오지 못했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관 둘은 물속에 뛰어들기를 거부했다. 소년은 사망했다. 책임 추궁을 받은 경찰관들은, 그런 상황에 대비한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물속에 뛰어들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소년의 어머니는 말했다.
"길을 가다가 아이가 물에 빠진 걸 보면, 지체 없이 뛰어들어야 옳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데 무슨 훈련이 필요한가요?" (22쪽)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도입부에 나오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남을 돕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희생해야 하는가?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돕지 않는 것은 악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철길 위에서 놀고 있는 아이에게 빈 기차가 굴러 내려가고 있다. 노선 변경 스위치를 조작하면 빈 기차가 다른 쪽 철로로 굴러가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쪽 철로에는 내가 평생 저축한 돈으로 얼마 전에 겨우 마련한 고급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다. 내 전 재산을 날려서라도 아이를 구해야 할까?
이 이야기를 들은 이는 백이면 백 모두 자동차를 희생해서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악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다음 사례는 어떤가?
당신은 빈티지 세단을 몰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이때 다리를 심하게 다친 히치하이커가 차를 세운다. 그리고 근처 병원으로 좀 데려다 달라고 한다. 당신이 거절하면, 그는 다리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그를 병원까지 태워다준다면, 좌석에 그의 피가 묻을 것이다. 지금 막 아주 고가의 부드러운 흰색 가죽 시트를 갈았는데. (35쪽)
이 경우에도 대다수는 부상자를 병원으로 데려다줘야 한다고 대답한다. 저자가 지적하듯, "눈앞에 사람이 있고, 구체적인 상황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꽤 높은 정도의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남을 돕는다.
덜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남을 돕는 것이 의무라는 사실을 논증해 보자. 피터 싱어는 다음과 같이 3단 논법을 시도한다. (제1 전제는 대전제이고, 나머지 3개의 명제가 3단 논법을 구성한다.)
제1전제: 음식과 주거, 의료 서비스의 결핍으로 고통 받고 죽는 일은 나쁘다.
제2전제: 우리가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이 우리에게 별다른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나쁘다.
제3전제: 구호 단체에 기부함으로써, 우리는 음식, 주거, 의료 서비스의 결핍으로 고통 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되 스스로는 별다른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
결론: 따라서 우리가 구호 단체에 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쁜 일을 하는 것이다. (36쪽)
생각해 보자. 스타벅스 카페 라떼 한 잔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에 아주 사소한 기스를 낼 뿐이다. 하지만 그 돈이면 아프리카 아이는 몇 끼니를 해결하거나 필수 예방접종을 받을 수 있다. 저자의 논증에 따르면, 우리에게 별다른 손해가 되지 않는 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구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나쁘다". 따라서 우리는 커피 값을 아껴 구호 단체에 기부해야 한다.
그런데 철로 위의 아이나 다리를 다친 히치하이커의 사례와는 달리, 이 논증에는 거부감이 든다. 사소한 일로 사람을 악인이라 몰고 가는 느낌이다. 커피 마시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고?
왜 기부하지 않는가?
내 생각에 기부를 꺼리게 만드는 가장 큰 두 가지 요인은, "왜 내가?"라는 질문, 그리고 구호 단체 에 대한 불신이다. 후자는 제도 정비가 필요한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쁜 빨간색 핀을 나눠주는 구호 단체가 직원들 회식에 기부금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기부 대상 단체를 잘 선별하는 것이다. 기부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이 적혀 있는 구호 프로젝트가 많기는 하지만, 사후 검증 체계는 여전히 부족하다. 예컨대 구호 물품을 전달하는 데 들어가는 부대비용도 '전달 금액'에 포함시키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된다. 부대비용의 대부분은 인건비다. 구호 단체 직원이 모금한 돈을 전달하러 남미로 날아가는 비용이 당신 돈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물론 그는 뉴욕을 경유할 것이고, 거기서 저녁도 먹을 것이다. 보고서상 기부금 100원이 모두 '전달된다'고 해서, 남미에 사는 소년이 100원을 전달받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이 '내가 100% 공감하는 대의를 실천하는 단체에 기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게는 국경 없는 의사회가 그런 단체다. 내 기부금 전부를 자체 운영비로 써버렸다고 해도 국경 없는 의사회라면 나는 괜찮다. 나는 그 단체의 대의에 100% 공감하니까.
두 번째 문제, "왜 내가 해야 하는가?"는 더 어렵다. 피터 싱어가 지적하듯, 여기에는 두 가지 물음이 겹쳐있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도와야 하느냐는 의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돕지 않는데 왜 나는 도와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전자는 '방관자 효과'와 관련 있다. 대중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명한 키티 제노비즈 살해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다. 1964년 뉴욕 퀸즈에서 이 여성은 주변 아파트에 살던 38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38명은 그 상황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경찰에 신고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 문제는 매칭 기부로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수만 명의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 대신, 가나의 어느 지방에 사는 소년 '마이낄'이 굶주리는 사진을 보여주면 된다.
두 번째 문제, 즉 공정성의 문제는 풀기 어렵다. 소득의 5%를 기부하려고 은행에 가는데, 소득의 5%로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이웃을 마주친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억울한가.
저자는 이성 대신 감성에 호소한다. 열 명의 아이가 물에 빠졌는데, 열 명의 어른이 이 모습을 목격했다. 나는 물에 뛰어들어 한 아이를 구해낸다. 열 명이 각각 한 아이를 구하면 되니까, 다 살았겠지, 하고 주위를 보는 순간, 당신은 놀란다. 다섯 명의 어른은 그냥 보고만 있다. 아직도 다섯 아이가 허우적대고 있다.
나의 공정한 몫은 한 아이만을 구하는 것에 머문다. 더 이상 구해야 할 책임은 없다. 그러나 스스로 그러한 논리에 대해 납득할 수 있겠는가? 다른 네 명도 한 명씩 아이를 구하고 팔짱을 껴버리고, 다섯 명의 아이가 빠져 죽는 것을 바라만 보는 것에? (196쪽)
어떤 행동이 필요한가
당연히 구해야 한다. 인간이 논리와 이성으로만 움직이는 존재는 아니지 않나. 머리로 안 되면 가슴으로 납득하면 된다. 이 책은 가슴에 호소하는 책이다.
내 생각에 피터 싱어는 기부의 당위성을 논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감성으로 우리를 설득했다. 물에 빠진 아이 여럿 중에 당신이 하나를 구했다고 해서, 나머지가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자동이체를 활용하자. 갑자기 기부를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귀차니즘이 후회할 결정을 막아줄 것이다. 나는 네이버 해피빈 정기저금을 이용한다. 매달 일정 금액이 해피빈 정기저금으로 자동이체된다. 모은 저금은 해피빈에 등록된 각종 프로젝트에 기부할 수 있다. 해피빈 계좌에 있는 돈은 어차피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없기 때문에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기부를 중단할 염려도 없다.
오늘 할 일은 이거다.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읽기, 그리고 자동이체로 기부 시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