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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y 24. 2023

울프는 평론가로도 일류

[책을 읽고] 버지니아 울프,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집이다. 다소 사변적이지만 여성 해방을 매우 실질적인 측면에서 살펴본 수필, <자기만의 방>이 유명하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문학 평론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전공자인 내가 읽기에도 대단히 어려운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활동하는 시대에 문학적 실험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핵심적 인물로 진행되던 그 실험에 대해 긍정적인 예언을 하고 있다.


한 가지 엄청나게 대담한 예언을 하자면, 우리는 영국 문학의 위대한 시대 중 하나의 언저리에 있습니다. (115쪽)



이 책에서 가장 신랄한 글은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이라는 비평이다. 그녀는 바로 전 시대 (에드워드 시대) 작가들과 그녀를 포함한 최근 (조지 시대) 작가들을 대비하면서 에드워드 시대 작가들을 대놓고 비판한다. 그런데 대진이 이렇다.


웰스 씨, 베넷 씨, 골즈워디 씨, 이런 분들을 에드워드 시대 작가들이라 하고, 포스터 씨, 로런스 씨, 스트레이치 씨, 조이스 씨, 엘리엇 씨, 이런 분들을 조지 시대 작가들이라 하겠습니다. (73쪽)


H. G. Wells는 물론 유명하고, Arnold Bennet도 이름은 들어봤다. 그러나 E. M. Forster, D. H. Lawrence, James Joyce, T. S. Eliott에 비하면 정말 초라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조지 시대 진영에는 버지니아 울프 본인도 포함된다. 


베넷 씨의 말을 좀 더 들어 봅시다. 그는 말하기를, 조지 시대 작가 중에는 위대한 소설가가 없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리얼하고 참되고 설득력 있는 인물을 창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88쪽)


베넷 씨가 말하는 리얼한 인물이란 이렇다. 그녀가 사는 빌라 이름은 뭐고, 얼마 짜리 장갑을 끼는지, 그녀의 어머니가 암으로 죽었는지 폐결핵으로 죽었는지가 전부 작품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울프는 까는 입장이니 다소 과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대 소설들에 나오는 묘사 과잉은 문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기억이 날 것이다.


결국 울프의 예언대로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 자신과 제임스 조이스는 모든 시대를 통 틀어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으며, 포스터, 로런스, 엘리엇도 엄청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놀드 베넷, 존 골즈워디는 어떤가? 제일 유명한 H. G. Wells조차 저 다섯 명에 비하면 아쉽다. 물론 그는 과학소설이란 장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니,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적어도 문학 평론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문학계의 이런 악덕을 반대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즐거웠던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목소리로 그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콘래드는 외국인이니 선배 영국 작가로서 뭘 배우기에는 부적합하고, 하디는 소설 쓰기를 그만둔 지 오래되어 역시 뭘 배울 수가 없다고 한다. 


"젊은" 작가들 중에서는 조이스가 주목할 만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역시 떡잎부터 알아보는 그녀의 안목이 돋보인다. 그녀는 연재 중인 소설, <율리시즈>가 흥미로운 작품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피네건의 경야>는 물론 <율리시즈>조차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 그런 예언을 한 것이다. 내 생각에는 아주 질 떨어지는 작품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만으로 그런 예언이 가능하다니, 역시 천재는 다르다. 


돌이 날아올까 해서 한 마디 덧붙인다. 영화에서 깡패도 읊조리는 유명한 시들을 써제낀 천재 시인, 딜런 토마스는 단편 소설집도 하나 썼는데, 제목이 <젊은 개로 묘사한 예술가의 초상(The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Dog)>이다. 조이스 소설의 원제, <젊은이로 묘사한 예술가의 초상(The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를 생각하면, 가볍게나마 까는 느낌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둘 다 작가 자신의 젊은 시절이 거의 자서전처럼 들어 있는 빌덩스로망이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데, 예이츠의 시들 중 내가 좋아하는 <라피스 라줄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철학에서 술투정 난투극으로, 사랑 노래에서 논쟁으로, 그저 흥겨운 놀이에서 심오한 사색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넘어간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모든 작가들이 다 그렇다. 그들은 우리를 지겹게 할지언정, 두려움이나 자의식에 빠져 있다는 느낌, 무엇인가가 그들 마음의 흐름을 가로막거나 제한하거나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게 하지 않는다. (123쪽)


<기우는 탑>에서는 그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학의 주체가 변해야 함을 역설한다. 1914년,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문학은 고등교육을 받은 금/은수저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상아탑이 기우는 중인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글을 써야 한다. 매일 글을 쓰고, 매일 그것을 위대한 작가들의 글과 비교하며 굴욕을 당해야 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 마디. 문학은 밟지 말아야 하는 "총장 잔디"가 아니다.


도보 여행가로 유명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한 고명한 인사가 보행자들에게 준 조언을 명심하기로 합시다. <침입 금지라고 쓰인 팻말을 보거든 즉시 침입하라>고 말입니다. 즉시 침입합시다. 문학은 그 누구의 사유지도 아닙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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