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Jun 02. 2023

프랑스 특산품 이야기

방사선 팝니다

국민성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양차 대전을 모두 한 나라가 일으킨 것이라든가, 어떤 나라에서 과학자는 줄줄이 나오는데 음악, 미술 쪽은 영 시원치 않다든가, 러시아 문학에서만 나타나는 뭔가 다른 그 분위기...


찐따라는 인상을 주는 나라가 몇 있다. 주변 국가들한테 매번 침략이나 당하면서 딱 한 번 아주 잠깐 동안 강국이었던 시절을 내세우는 중부유럽의 P국, 자기가 2000년 전 대제국과 같은 나라라고 착각하며 이웃 국가를 침략할 때마다 깨지는 I국, 그리고 무슨 일이든 잘못되면 이웃한 강대국에 운명을 탓하는 몇몇 나라들. 


내가 국가를 의인화하는 아동틱한 상상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어떤 사실에 대해 알게 됐는데 "어? 또 그 나라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게 정말 우연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게 가장 인상 깊은 찐따국은 프랑스다. 프랑스는 물론 인류 전체에 수많은 기여를 한 중요한 나라다. 나는 프랑스 혁명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수많은 프랑스 작가와 화가를 좋아한다. 그런데 "또 프랑스야?" 하는 말을 자꾸 하게 된다.


100년쯤 전에 그 나라에서 또 한 차례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프랑스 국기는 가장 아름다운 국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기도 영국이 더 멋있다는 게 함정)


N선이라는 프랑스 특산품


1903년 프랑스 물리학자 블롱들로(Blondlot)는 아주 신기한 새로운 광선을 찾아냈다. X선을 필두로 다양한 새로운 방사선이 발견되던 시대라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재직하던 낭시(Nancy) 대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이 새로운 방사선을 N선이라 명명했다.


곧바로 N선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특성을 연구한 300여 편의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두 프랑스에서 나온 논문 뿐이었다. N선은 X선 편광 실험 중에 발견되었으므로 실험 재연은 상당히 쉬운 편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연구들이 N선이 자연계에 흔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N선은 프랑스에서만 관측되었다. 영국, 독일, 러시아, 미국 학자들이 N선 관측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계속해서 N선 관측에 실패한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우드는 프랑스에 가야 N선을 관측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낭시 대학교까지 찾아가 블롱들로 본인에게 N선 실험을 부탁했다. 


N선은 어두운 방에서만 관측이 가능했다. 방이 어두운 것을 이용해서, 우드는 실험장치에서 알루미늄 스펙트럼을 빼버렸다. N선은 X선이 알루미늄 스펙트럼과 반응해야 방출되는 광선이었다. 그런데도 블롱들로는 N선의 스펙트럼을 분석하며 수치를 읽어주고 있었다.


우드는 자신이 겪은 일을 <네이처> 지에 기고했다. 이것이 1904년의 일이다. 


그런데도 블롱들로는 1904년 르콩트(Le Conte) 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학술 상인 이 상을 받을 당시 블롱들로와 경쟁한 학자로는 피에르 퀴리, 즉 퀴리 부인의 남편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이미 N선에 대한 갖은 의혹이 팽배하던 시기였으므로, 수상 이유에서 N선 발견은 목록 맨 마지막에 자리하기는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전 세계가 보내는 의혹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랑스 학계는 블롱들로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푸엥카레 같은 명망 높은 학자도 있었다.


사기꾼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왠지 라스푸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도덕 문제인가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블롱들로가 의도적으로 사기를 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N선 발견으로 그가 부와 명예를 거머쥔 것은 맞지만, 사기를 계획한 것이라면 다음 단계가 있어야 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드가 실험을 재현해 달라고 했을 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실험실로 그를 초대했다. 사기꾼이었다면 그렇게 자신만만했을 리 없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당시 주변국들과의 과학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국가적 자존심이 개입되자, 다른 나라에서는 관측되지 않는 N선이 프랑스에서만 관측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확증 편향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프랑스=찐따라는 이미지를 강화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중요한 점은, N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폭로가 프랑스 내부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황우석 사건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황우석 편을 들었다. MBC 피디수첩 팀이라는 단 하나의 집단을 제외한 전체가 말이다. PD수첩이 없었다면, 후폭풍의 규모가 달랐을 것이다. 1904년, 프랑스라는 나라에는 PD수첩과 같은 양심이 없었고, 과학에 애국심을 들이 대다가 국가적 망신을 당했다.


물론, N선 사건은 황우석이나 오보카타 하루코의 사례와 같은 논문 조작도 아니고, 화석이나 구석기를 조작한 찰스 도슨이나 후지무라 신이치의 사기 행각과도 다르다. 의도적인 사기였다면 더 큰 비난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반박을 무시하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고집한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는 신학자가 아니고 물리학자였다.


다양한 목소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파레토 법칙, 소위 80:20 법칙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거기에서 80이나 20을 없애 버려도, 즉 동질성을 강제해도 동질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분리된 집단은 그 내부에서 다시 80 대 20으로 갈린다고 한다. 동질성이라는 재앙을 자연이 거부하는 것 아닐까.


나치 치하에도 20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있었다. 하얀 장미회와 같은 비폭력 저항 단체도 있었고, 히틀러에 대한 암살 시도도 여러 차례 존재했다. 그걸 계속해서 누른 나치는 결국 패망했다.


하얀 장미회 리더 한스 숄, 소피 숄 남매. 둘 다 학생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농사를 지을테니, 기본소득을 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