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Jun 21. 2023

생각의 깊이라는 건, 없다

[책을 읽고] 닉 체이터, <생각한다는 착각> (1)

사고 과정, 무의식적 사고, 잠재의식, (대니얼 카너만의) 시스템 1과 시스템 2.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감한 주장이 눈을 끈다.


<마음은 평평하다(The Mind is Flat)>가 원제다.

말 그대로다.

우리의 마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하고 정교한 기계장치가 아니라,

순간순간에 대응하는 1차원적 반응 머신이다.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하나,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둘,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주장의 타당성


첫 번째 질문부터 살펴보자.

근거는 충분한가?

닉 채터가 새로이 들고 나온 근거는 없다.

그간 뇌과학 실험을 통해 밝혀진 많은 사실들을 제시할 뿐이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 사이의 패스 횟수를 세는 사람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고릴라를 못 본다든가,

2차원 무늬를 입체로 인식하거나,

가방, 벽지, 기계장치, 화성 사진에서 사람 얼굴을 찾아낸다든가,

뇌량 절제술을 받은 환자들이 눈에 비치는 화면의 왼쪽을 보지 못한다든가,

함께 놓인 사진의 내용에 따라 같은 표정이 전혀 다른 감정으로 보이는 것 (쿨레쇼프 효과) 등등.


저자 자신에게는 저런 실험 결과가 <마음이 평평하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평평하다>라는 저자의 주장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은 상당히 저차원적 기계라는 뜻이다.

저자도 말하듯, 인간 마음의 강력한 힘 중 하나는 은유다.

<마음이 평평하다>라는 문장 자체가 은유다.

다소 복잡하게 설명해야 하는 주장을 <마음이 평평하다>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과연 은유의 힘은 대단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근거로 제시하는 뇌과학 실험 결과들을 가지고 은유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저자가 <마음은 평평하다>라는 문장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은 한 순간 단 하나만을 인식할 수 있는데, 그건 뇌라는 컴퓨터가 계산해 낸 하나의 결과, 즉 감각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낸 해석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은 멀티태스킹을 할 수 없으며, 사고 과정을 트래킹할 수 없고, 어떻게 그런 해석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한다.


첫 번째 파트, 즉 인간의 마음이 멀티태스킹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인정한다.

<멀티태스킹>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소모적 논쟁을 하지 않는다면, 이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파트, 사고 과정을 트래킹할 수 없다는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물론,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를 트래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건 그런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자기 나름대로 그런 시도를 했고, 후설과 하이데거는 더 본격적인 의미에서 그런 시도를 해서 꽤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테드 창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기계인간처럼, 우리 인류도 자기 뇌를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또한 저자는 무의식적 사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무의식적 기억이라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또한 동의할 수 없다.

<호모 프로스펙투스>의 공저자, 찬드라 스리파다가 지적하듯, 대뇌피질은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기억에 특화되어 있다.

이 부분을 우리는 대개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장기적이고 체계화된 기억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뇌피질의 <빅데이터>는 우리가 장기적이고 체계화된 기억을 만드는 재료다.

이것이 무의식적 기억, 무의식적 사고가 아니라고 한다면, 닉 채터는 <기억>, 그리고 <사고>라는 단어를 재정의하며 말장난을 하는 궤변가에 불과하다.


Kuleshov Effect


주장의 유용성


저자의 주장은 첫 번째 질문을 통과하지 못했으므로, 두 번째 질문은 필요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도 살펴보자.

<마음이 평평하다>라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건 어떤 의미 또는 쓸모가 있을까?


저자는 평평하기 그지없는 우리 마음이 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으로 은유를 꼽는다.

심지어,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은유는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라 말한다.

인공지능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이런 엉성한 주장을 하는 대담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저자는 <기억>이나 <사고>라는 단어를 자기 마음대로 규정해서 인간에서 무의식적 기억이나 사고의 깊이가 없다고 말한 다음, <은유>라는 단어를 제대로 정의하지도 않고 그것이 인간 최후의 무기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주장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에게는 은유가 있으니 괜찮다는 위로다.


인공지능에게 은유가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은 너무 엉성해서 반박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저자는 필경 은유라는 단어를 재정의하며 내 주장을 반박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 은유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일단 인정하고, 묻고 싶다.


그래서 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인간의 사고 기능이 고차원적인 것이든 저차원적인 것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스템 1과 시스템 2라는 구별이 없다고 치면, 그건 또 무슨 상관인가?

인간의 사고 방식을 1개로 나누든, 2개로 나누든, 169개로 나누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대니얼 카너만이 인간의 사고 방식을 시스템 1과 시스템 2로 나누었을 때, 그건 의미가 있었다.

진화 적응을 통해, 인간은 시스템 1적 사고를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생활은 시스템 1에 적합하지 않은 상황을 많이 만든다.

그래서 잠깐 시스템 1의 자동사고를 멈추고, 시스템 2를 가동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세상은 복잡하고, 인간은 분류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야 복잡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 1과 시스템 2가 사실은 하나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나의 뇌가 하는 일이니, 사실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은 당연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게 그냥 남의 주장을 반박하고 내 주장이 맞다고 어그로를 끄는 용도밖에 없다면, 도대체 왜 그런 주장을 해야 하는지 의아할 뿐이다.


Mooney Faces


결론


대단히 즐거운 독서였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다. (번역투로 가득한 번역은 아쉬웠다.)

저자의 주장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고정 관념을 다시 돌아보고, 뇌의 작동 방식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기회였다.

이렇게 독서는 삶에 깊이를 더한다.


*** 계속 ***

매거진의 이전글 어색한 표현일까 잘못된 표현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