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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23. 2023

둔필승총 이야기

다산이라 그런지 말도 멋지다

나는 <둔필승총>이란 제목으로 읽은 책들에 대한 간략한 소감을 남긴다.

좋은 책들을 추천하기도 하지만, 주 용도는 개인 기록이다.


예를 들면 이런 용도가 있다.

최근에 칼 필레머의 책을 읽었는데, 60대 이상의 인생 선배들을 심층 인터뷰해서, 삶의 지혜를 배워보자는 기획으로 만든 책이었다.

이런 기획, 이런 책. 분명히 예전에 본 적이 있다.

둔필승총 DB를 뒤져본다.

없다.

이 책은 읽은 적이 없다고 결론 내린다.



몇 년 전부터는 엑셀 파일로 읽은 책을 정리하고 있다.

간단히 메모를 남기는 칸도 있지만, 스프레드시트 한 칸에 적기에 할 말이 넘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둔필승총이 우선이다.


***


한참 전 일이다.

어떤 책에 대해 간략히 리뷰를 남겼는데, 그 책 저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 내가 쓴 글보다 더 긴 댓글을 달았다.

마구 화를 내면서, 나를 찾아내서 어떻게 하겠다는 협박 투였다.

하루에 50명도 안 오는 블로그에 와서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기분 나쁘기도 해서, 그냥 글을 지웠다.

그 저자는 원하는 결과를 얻은 셈이다.


당시에는 너무 기분이 나빠서 별 생각 없이 그냥 지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박제해 둘 걸 그랬다.

한참 잘 나가는 그 작가의 인성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데, 내가 생각이 짧았다.


아니지.

진짜로 나를 찾아와서 행패라도 부렸다면...

행복이 인생의 최종 목표는 아닐지 몰라도, 불행을 추구하는 일은 어리석다.


***


'둔필승총'은 둔한 붓이 총명함(머리)을 이긴다는 뜻이다.

다산 정약용이 쓴 말로, 메모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이니, 비슷한 말로는 (예전 어떤 정권에서 회자되었던...) 적자생존이 있겠다. 



원래는 웬만한 책이라면 아주 짧게라도 소감을 남기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한 달쯤 전에 생각을 바꾸었다.

실망한 책에 대해 뭐라고 쓰는 것은, 쓰는 나 자신으로서도 괴로운 일이다.

그 책을 읽을 때 느꼈던 그 괴로움을 다시 한번 느끼는 셈이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나는 배우 박용우의 팬이다.

<뷰티풀 선데이>를 적어도 세 번 이상 봤다.

그 영화가 좋아서 여러 번 본 게 아니다.

볼 때마다, "어? 내가 안 본 박용우 주연 영화가 있었어?" 라고 외치며 보았다.

영화가 너무 안 좋아서, 기억에서 싹 지운 결과다.


책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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