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신이 멀쩡한 것도 아닌 상태. 비가 오거나 안개 낀 날에 맥주를 과하지 않게 한두 잔 마시면 대체로 비슷한 기분이 된다.
간혹 출근길에 안개가 끼는 날을 맞이한다. 내가 사는 파주는 1년에 백일 가까이 안개에 휩싸인다. 축복일까, 재앙일까.
안개의 도시, 파주
오래전, 파주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파주출판단지에 가서 영화 <파주>를 보았다. 안개가 자욱한 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량. 불안함과 모호함. 이것인지 저것인지 모를 분위기. 그런 감정으로, 맥주를 마시면서 영화를 보았다.
안개 도시 파주. 한강과 임진강과 곡릉천을 끼고 있어서 물이 만나고, 습기도 많이 찬다. 집에 보관해 둔 옷이 철이 지나면 곰팡이가 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그래도 안개가 싫지는 않다. 아니 좋다. 김승옥이 소설 <무진기행>에서 무진의 명산물을 안개로 꼽은 것도 걸작의 이유가 아닐까.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필사
만일 나에게 불법이 딱 한 차례 허락된다면 무엇을 할까. 나는 안개가 자욱한 날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맥주를 적당히 마신 뒤 운전대를 잡고 비오는 날 어울릴 법한 노래를 틀어놓고 자동차로 안개 속을 서서히 달리고 싶다. 옆에도 맞은편에도 차가 없고, 길은 직선으로 뚫려있다면 더 없이 좋을 테지.
하지만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기에, 나는 맥주를 마신 다음이면 빗속이나 안개 속을 터벅터벅 걷는 걸로 대리만족하곤 한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오늘. 그러고 보면 우리의 내일은 항상 안개가 낀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그 길을 떠나면 무서움보다는,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일상은 언제나 모호하다. 사람도 대체적으로 선악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여러 가지 색깔과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니. 내가 좋다고 좋은 사람은 아니야. 나에게 좋은 사람일 뿐이지. 내가 싫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야. 누군가에겐 한없이 너그럽고 선한 사람일지도 몰라. 그걸 인정하기로 했다.
각자의 인생이 있다. 나에겐 보잘 것 없고 사소한 것이 남에겐 생명처럼 소중할 수도 있고, 정반대의 경우도 있을 거야.
안개가 걷힌 파주 하늘은 대체로 맑다. 파주 하늘을 사랑한다. 특히 가을 하늘은 나를 매료시킨다. 자유로에 부는 강바람도 몸으로 느껴보고 싶다. 안개가 끼건 구름을 머금건 해가 비추건, 아름다운 한강과 임진강.
어찌 보면 우리는 항상 안개 속을 걷고 있다. 삶의 불확실성, 이것이 때로는 설렘과 흥분을 주기도 한다. 혼자 떠나는 장거리 여행, 기차 옆에서, 길거리에서, 식당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 누구를 만날지, 누가 어떤 도움을 줄지, 해코지를 할지 알 수 없다.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 하다가 문득 든 생각. 어떻게 내일이 확실할 수 있지? 미래는 선명해야 할까? 인생의 재미는 혹시 미래의 불확실성과 우연이 작용해야 가능한 일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