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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무개 Sep 06. 2021

인형

심심할 때 글쓰기

어쩌면 내가 인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대한민국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람을 상대한다는 거 자체가 고된 일이지만 만약 그 상대가 특정 집단이라면 어떨까? 아이의 어머님이라면. 더 나아가 '맘카페'를 무기 삼는 아이를 가진 고객이라면. 정말 극한 직업이다. 편의점, 노래방, 술집 등을 비롯해 웬만한 서비스업을 다 해봤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이 정말, 정말 역대급이다. 내가 현대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예의 없고 염치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지 모르겠다. 

무섭다. 내가 개인을 혐오하는 감정이 집단으로 퍼질까 봐. 맘카페를 무기로 사용하는 여자가 아니라 아이의 엄마를, 더 나아가 여자를, 한 발 더 나아가 나를 포함한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미워할까 무섭다. 두렵다. 염치를 모르는 자에게 자란 아이들은 얼마나 더 큰 괴물이 될지. 인두겁의 탈을 쓴 괴물을 만나 나라는 사람이 혹은 소중한 사람이 무너질까 두렵다.

과거의 시대상이 '열심히'와 '성실히', 다 같이 성장하자였다면 지금의 시대상은 '독하게', '나만 아니면 돼'로 바뀐 것 같다. 시대는 가파르게 변하고 나는 거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생물은 자연도태될 수밖에 없다는데……. 나는 조만간 이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을까 싶다.

아아, 어머니 당신은 제게 착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하셨는데 시대가 너무 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커버렸어요.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관상을 믿진 않지만 하도 사람들을 보다 보니 '인상' 정도는 느껴지더라. 그간의 진상 데이터를 토대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대충 느낌이 오는데 높은 확률로 일치한다. 그리고 오늘 쎄한 느낌을 풀풀 풍기는 어머님이 들어왔다. 액자를 받으러 오셨는데 '사진'을 안 보고 모서리만 보고 있더라. 3분 정도 지났을까? 느낌이 쎄하지만 뒤탈 생기는 게 싫어 "무슨 문제 있을까요?"라고 여쭤봤다. 어머님께선 대사를 내뱉듯 속사포로 말하더라. "이거 흠짓난 거 같은데요?" 사각형의 액자를 만들려면 접합부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사각 형틀이 있지 않는 한 당연히 생기는 건데……. 그래도 어쩌겠나, "어머님 접합부 같지만 어머님 원하시면 재제작해드리겠습니다."라고 응대했다. 어머님께선 그럴 필요 없다고 일단 가져가고 맘에 안 들면 그때 연락하겠단다. 그건 안 된다고 말씀드리니 그냥 갈게요. 하고 가셨는데, 다음 날 모든 액자가 마음에 안 든다더라. 

우선 정사각형 액자에 왜 원본 사진을 그대로 안 넣어냐고 묻더라. 직사각형 사진을 정사각형에 넣으면 당연히 잘릴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게 싫으면 여백을 남겨서 다시 만들어드린다니까 여백이 남는 액자는 싫다더라. 그럼 직사각형 사진을 어떻게 여백 없이 정사각형이 넣나요…? 

2

가끔 통화만으로 '찐'이라는 느낌이 드는 진상이 있다. 이 분이 그랬다. 다른 직원이 인상 전 가격으로 설명을 해서 중간에 오해가 생겼다. 그래서 그냥 인상 전 가격으로 진행하기로 했는데, 기분이 나쁘다고 하신다. 연신 죄송하다고 뭐라도 챙겨드린다고 말씀드리니 그제서야 좀 풀리셨다. 촬영 당일, 아이의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은데 컨셉을 추가한다고 하셨다. 이럴 경우 표정은 정말 안 나올 수 있다고 말씀드리니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해야죠?"라고 하시더라. 정말 충격적인 대답. '그쪽'이 '알아서' 하란다. 낯가리고, 잠 오고, 배고픈 아이에게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재우고, 먹이고, 적응하자고 말해도 묵묵부답. 촬영을 안 들어가니 기분은 나쁘다고.

결국 최악의 컨디션인 상태로 들어갔고, 결과는 앞서 말했듯이 울면서 찍었다. 낯가리는 아이가 어머님과 떨어져서 안 울고 무표정으로 찍으면 다행이긴 한데 어머님은 성에 안 차신단다. 표정이 왜 이렇냐고 따지기에 구구절절 설명드리니 "그건 모르겠고 아기 표정이 안 나와서 기분이 나빠요."라는 말과 "제가 이렇게 말해줘야 회사가 발전을 하죠?" 하며 나가더라. 

폭풍 같은 날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다음 날 어머님께선 계속 전화를 걸었다. 기분 나쁜데 맘카페에 올려도 되겠냐 물어보신다. 연신 죄송하다 반복하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하란 건지 모르겠다. 아기 표정이 안 나와서 기분이 나쁘다. -> 컨디션 안 좋을 때 들어가면 표정이 안 나온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라고 말하면 그건 모르겠단다. 기분은 나쁘고, 내가 하는 말은 다 모르겠단다. 화내고 끊고 다시 5분 뒤에 전화 와서 1시간 동안 기분 나쁘다고 하고 끊고. 그렇게 3번 정도 반복하니 멘탈이 나가더라. 그날 아무것도 못했다. 정신은 진즉에 나갔고 마지막 통화 때 말씀드렸다. "어머님, 대체 제가 뭘 어떻게 더 해야 어머님 마음이 풀릴까요?"라고 말씀드리니 그제야 원하는 걸 말하더라. 결국 다 해준다고 했다.

이후가 더 가관이다. 하란 대로 다 해주니 갑자기 친절해지더라. "그쪽에서 찍은 사진들 너무 마음에 들어요. 다음에 또 찍으러 갈 건데 잘 부탁해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이상한 건가? 모르겠다. 다만 제발 그만 마주치고 싶다.

죄송하지도 않은 상황에도 "죄송합니다"만 연신 외쳐대는 내가 싫다. 미안하지 않는데 왜 죄송하다고 해야 할까? 

오늘도 이 지겨운 밥벌이를 계속하기 위해 죄송합니다만 남발하는 인형이 된다.

3

내가 근무하는 곳은 다른 곳에 비해 굉장히 저렴한 편이다. 평균보다 30 ~ 40% 정도 낮은 금액이기에 서비스를 챙겨주더라도 금액적인 부분에서 DC는 안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고 빌고 애원하는 집이 있다. 첫째, 둘째, 셋째 그리고 이제 넷째까지 찍으러 오는 집이다. 그간의 정이 있어 10만원이 넘는 금액을 할인해서 계약했다. 문제는 그날, 상품을 설명할 때 인상 후 상품표가 없어 인상전 상품표로 설명을 했고, 어머님은 더 낮은 가격을 보더니 그 가격으로 해달란다. "내가 말 안 했으면 어차피 그 가격으로 하는 거잖아요?" 몇 년 동안 처음으로 할인해드린 건데……. 호의를 베풀었음에도 실수를 하나를 잡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두 시간 가까이 실랑이 끝에 내 사비로 액자, 앨범을 더 챙겨드리는 걸로 마무리했다. 눈물은 나지 않지만 슬프더라.

오늘도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인형이 된다.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형.

그저 "죄송합니다."만 말할 수 있는 인형.

나는 오늘도 인형이 됐다.

아, 그래도 하나 다행이네.

거짓말할 때 코가 늘어나진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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