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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무개 Sep 27. 2021

당연하지 않은 것

심심할 때 글쓰기


'아…… 망했다.'


침대엔 기다리다 지쳐 잠에든 여자친구가 누워있다.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다 문득 여자친구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더라. 대구에 내려온 지 3년, 계획하진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여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했다. 24시간 중 근무하는 시간을 빼면 항상 같이 있다 보니 언젠가부터 가족처럼 느껴지더라. 가족…… 정확히 말하면 여자친구는 어머니 같았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녀가 베푼 호의들이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마치 어머님이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처럼.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꼈던 건 9월 11일, 오랜만에 같이 쉬는 토요일이다. 여자친구는 전날부터 밖에 나가 데이트를 하자고 했고, 우리는 경주에 가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밤에도 일을 했다는 것이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이상할 정도로 몸이 뻐근하더라. 그간의 피로가 확 몰아쳐온 기분이랄까? 저번 주에 서울에서 나흘 동안 쉬지 않고 놀았고, 대구에 돌아와선 쉬는 날 없이 십일 가까이 일만 했다. 낮에는 회사에서 밤에는 집에서……. 오랜만의 휴일이라 생각하니 긴장이 풀렸고, 그간 쌓여왔던 피로가 확 몰아쳐왔다. 나는 그렇게 눈을 뜨고 감기를 반복하다 다시 잠들었다. 


몽롱한 정신을 잡고 정신을 차리니 벌써 2시가 넘었다. 아아, 경주는 물 건너갔구나. 사실 지금이라도 준비하면 되는데……. 이미 여자친구는 잠들었다. 이제 와서 깨우기도 민망한 상황. 며칠 동안 날씨가 오락가락했는데 웬걸? 오늘은 미울 정도로 날씨가 좋다. 여자친구는 갈 곳을 정해놓고 컨셉에 맞는 옷까지 골라놨는데 나는 침대에 나자빠져 누워있었다. 어질러질 책상과 너저분한 내 꼬라지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여자친구는 당연히 내 옆에 있을 테니 다음에 가도 되잖아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자위하고 있더라.


처음 여자친구를 만났을 때도 이랬을까? 타인이 베푸는 호의는 당연한 것이 아닌데 언젠가부터 나는 그걸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다. 아, 나란 놈은 정말 글러 먹었구나.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일렁일렁 올라온다. 나 자신이 밉고 역겨워진다. 다만 이런 감정에 지배되는 건 좋지 않기에 훌훌 털고 나아가려 한다. 잘못된 걸 인지했으면 고치면 된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한다. 샤워를 하고 맑은 정신으로 대청소를 시작한다. 책상의 상태는 내 정신 상태를 반영한다고 생각하기에 정리되지 않은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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