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할 때 글쓰기
정리를 칼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 업무를 보는 책상, 옷방을 비롯한 집 구석구석까지 깔끔하게 오와 열을 맞춰 정리하는 사람. 대화가 끝나면 바로 나가기 버튼을 누르는 사람. 그렇게 무엇이든 칼처럼 정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리는커녕 실오라기 같은 미련조차 못 버리는 사람도 있다. 어릴 적 이사 갔을 때 관리 미숙으로 잃어버린 편지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모든 편지를 비롯해 장문의 문자와 카톡을 지우지 않고 갖고 있는 사람. 미련이 어찌나 많은지 핸드폰 용량이 꽉 차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그 미련 덩어리가 오늘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핸드폰 용량이 꽉 차서 카카오톡 캐시 삭제를 눌러야 했는데 데이터 삭제를 눌렀다……. 아아, 빌어먹을. 잘못을 인지하고 되돌리기엔 뒤로 가기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 카카오톡을 재설치했고, 직전에 백업한 파일이 없어 모든 대화창을 날렸다.
한 개의 대화창조차 없어진, 깨끗한 카카오톡을 보니 갑자기 헛웃음이 나더라. 내가 개명을 할 때 마음먹었던 건 과거의 모든 것을 끊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로 개명한 것이었는데 과거의 조각이었던 카톡조차 초기화하지 않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게 우습더라.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 다짐했지만, 어쩌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엔 사람들이 나를 바라봐 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것 같다.
속상한 마음에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괜찮아, 실물은 없어졌지만 그들의 고마움은 네 마음에 있잖아."라고 말하더라. 아아, 대화창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들이 내게 베풀었던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나를 생각해 주고 신경 써준 그들의 흔적은 내 가슴에 남아있다. 타의지만 나는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미련을 버리자. 고마운 건 마음으로 기억하고 앞으로 나아가자. 어찌 보면 그간의 카톡의 기록은 추억이자 속박이었다.
매번 연말이 되면 항상 주위의 지인들에게 안부 연락을 돌린다. 연락을 돌리려 전화번호부를 켜는데, 등록된 번호가 너무 많다. 900개, 과하다. 여기서 연락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미련이 많은 사람, 혹시나 내게 연락을 할까? 혹은 내가 연락을 할까? 하며 간직했던 번호들. 카카오톡의 추억도 없어졌겠다, 나도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려는 마음으로 생에 처음으로 연락처 정리를 했다. 우선 이 년 이상 연락하지 않은 사람을 고른다. 초등학교 친구,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선배, 아르바이트하다 만난 사람, 공연하다 만나 사람들.
지우려는 연락처를 누를 때마다 그 사람의 얼굴이,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들과 어떤 일을 했는지 추억을 나눴는지 기억나는 사람도 아예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추억과 미련, 나는 그걸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과감히 삭제 버튼을 누르고 누른다. 그렇게 고른 400 여개의 연락처들. 과감하게 지운다. 남은 연락처 400여 개, 그래도 많다. 한 번씩 전화를 돌린다. 받는 사람, 안 받는 사람, 부재중 전화를 보고 다시 연락을 주는 사람과 그대로 무시하는 사람. 마지막의 경우를 다시 지운다. 그렇게 지우고, 고민하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다시 절반으로 만들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모두를 사랑하기엔 내 체력에 한계가 있다.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신경을 소중한 사람들에게 집중해야겠다.
ps. 카카오톡 복구가 있었는데 몇몇 업체에 연락했지만 데이터를 삭제한 경우 안 된다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