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재즈처럼
갑자기 분위기 딴소리
나는 지금이 좋다.
가을이 오고 있는 여름 끝자락의 토요일 23시 13분. 남편의 작업실에서 흘러나오는 정신없는 재즈와 내 발 밑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우리 집 댕댕이까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좋다.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치열하게 경쟁하던 10대도 지났고, 남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허접한 자격지심에 고통받던 20대도 지났고, 내 남편을 죽일 듯이 괴롭히던 시간마저도 다 지나간 33세의 지금 이 순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다.
클래식과 재즈
18살 때 지금의 남편을 처음 알게 됐다. 음대를 준비하던 나는 이제 막 음악을 제대로 접했다는 그를 보고는 반갑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하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5살 꼬꼬마 때부터 음대만을 생각한 나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는 것 같은 그가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승부욕에 우리는 서로 싸움만 해댔다.
내가 해 온 음악과 그가 하려는 음악의 색깔이 매우 달랐기 때문인 줄 알았다. 점처럼 작은 악상 기호까지 지켜내야 하는 음악을 배워왔던 나.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듯, 형식 없이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 목표인 음악을 하는 그. 함께 연주를 할 때 이런 차이로 엇갈릴 때마다 나는 그를 몰아붙였다. 내가 하는 음악의 방식대로 따라오기를 강요하면서. 그럴 때마다 그는 내 방식이 불편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따라와 줬다.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우린 이렇게 우정과 싸움을 반복했다.
음악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와 그가 클래식과 재즈처럼 달라서였음을 33세가 지나 이제야 알게 됐다.
나는 나로, 그는 그로.
연애할 때 우리 둘 사이 힘(?)의 방향성은
확신컨대 '항상' 그랬다.
내가 뜨겁게 몰아가면,
차가웠던 남편의 온도가 살짝 미지근해진다.
내가 강하게 몰아가면,
아무 생각 없던 일도 그에게 이전보다 중요한 일이 됐다.
내가 빠르게 몰아가면,
그만의 차분한 방식이 있었지만 더 효율적이긴 했다.
내가 큰 소리로 몰아가면,
그의 감정이 있었지만 내 목소리가 그것을 앞질렀다.
뜨겁고 차가운, 강하고 부드러운, 빠르고 차분한, 커다랗고 조용한.
나와 그의 다른 성질.
클래식과 재즈의 사이에 스타일 차이만 있을 뿐 '맞고 그름'이 없듯이, 그와 나의 다름들에 '맞고 그름'이 없다는 것을 외면했던 나는 그가 내 방식과 온도에 모두 맞춰주는 것이 익숙해지고 그게 마땅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이는 남편이 자신보다 나를 더 낫게 여겨준 것에서도 기인하는데, 남편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줄 몰랐던 나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 조차도 나에게 맞추는 것이 더 좋은 것,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재즈를 클래식처럼 연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행여 할 수 있다고 해서 더 ‘좋은’ 음악이 되는 것이 아니듯(기존에 없던 ‘다른’ 음악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는 내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처럼 된다고 하여도 더 좋은 그가 되는 건 아니다. 이미 재즈 그 자체가 좋은 음악이듯 남편 자체가 좋은 인간이라는 점을 왜 ‘이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후에야 깨달았는지. 보보의 늦은 후회가 떠오른다.
(클래식이고 재즈고 뭐고 이런 점에서 한국 가요 만세)
‘이혼’ 발언 이후, 약 3개월이 지난 지금, 남편은 아직도 날이 새도록 재즈를 듣고, 나는 출근길에 클래식FM을 들으면 상쾌하다. 우린 여전히 다르지만 여전히 함께 있다. 나는 나로, 그는 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