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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mma Han Mar 03. 2021

감사의 시제(時制)

저 많은 우산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점심을 먹고 늘 산책을 다니는 길이 있다.


4월이 되면 활짝 핀 벚꽃나무로 가득차는 아름다운 길.



고즈넉한 그 길을 통과하면 교보문고도, 알라딘 중고서점도, 그리고 한강으로도 갈 수 있다.


(이래서 나는 마포구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 길 중간에 늘 나의 궁금증을 자아내던 집이 한 채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올 법한 철문 입구로 된 단독주택.


이 집은 다른 집과 달리 늘 철문이 활짝 열려있다.


그리고 가끔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는 사람들이 그 집 대문앞을 힐끗거리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나도 함께 그 옆에 서서 힐끗거려보았다.


살짝 열린 철문 사이로 보이는 집 마당은 꽤나 어수선한 광경이었다.


여기저기 박스가 쌓인, 당장이라도 이사를 갈 것 같은 그런 모습.



‘뭐지...궁금하다...’



그 궁금증은 몇 달 후 파란색 철문 앞에 붙은 메모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우산과 우유팩을 모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앞에서 서성이던 사람들 손에 우산이


잔뜩 들려있었던 것 같다.



파란 철문집 주인이 우유팩과 우산을 기부 받아 좋은 일에 쓰는지, 아니면 이웃의 온정으로 모은 것을 살림에 보태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것까지는 궁금하지 않다)



단, 저 한 문장이 나를 사로 잡았다.


우산과 우유팩을 모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름한 철문의 모습과는 약간 어울리지 않게 명조체로 프린팅되어 깨끗하게 코팅까지 되어있는 메모로 알 수 있는 정보는 하나 이상이다.



1. 저 집은 우산과 우유팩을 모아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있구나.


2. 저 집은 지금 우산과 우유팩을 모으고 있구나.


3. 이제까지 별 다른 안내(간판) 없이 잘도 우산과 우유팩이 모였구나.



© chesnutt, 출처 Unsplash


글로 된 #넛지 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물론, 우유팩과 우산을 가져다 주세요. 같이 더욱 확실한 문장에 더 반응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왠지 저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까지 모인 것에도 감사,

그리고 앞으로 모일 것에도 미리 감사. 하는 시제 파괴적인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미 우산이 마당을 꽉 채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힐끗 또 봤다) 의연히 감사할 뿐인, 수요가 한정 없다는 듯한 끄덕 없는 기세.




우산의 사용처를 모르니 고장난 우산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앞으로 내가 그곳의 대문을 두드릴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지만, 당분간은 매일 오후 나도 모르게 우산과 우유팩이 얼마나 모였는지 힐끗거릴 것 같다.



그리고 (위에서 시크한 척 했지만) 언젠가는 도대체 저 많은 걸 대체 왜 모으는 건지도 궁금해 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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