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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mma Han Jul 29. 2020

화려한 관성이 나를 감싸네

멍청비용_지불_ssul_푼다


#scene 1.

지난 금요일. 코레일로 광주행 기차표를 예매 중인 나.



ktx는 미취학 아동(만 6세)까지 무료로 탑승할 수 있다.

하지만 무료로 이용할 경우 자리를 배정해 주지는 않는다. 보호자 무릎에 앉은 채로 이동해야 하는 것.

이제 60개월이 된 아이를 두시간 가까이 무릎에 앉히고 갈 수 없어서, 출발 전날 내 자리 옆으로 유아석을 예매했다.



유아 좌석은 성인 좌석의 75%의 가격에 예매할 수 있다. 내 좌석이 4만원 중반이었고, 아이의 좌석은 만원 정도였다. 그정도 금액은 내 컨디션을 위해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다.


아이가 4살정도까지는 무릎에 앉히고 가는 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설이었나. 시댁에 가려고 여수행 ktx를 끊었을 때 달랑 두 자리만 예매한 것을 오며 가며 내내 후회했었다.

그 이후로 ktx예매 = 유아석은 필수가 나의 시스템에서는 하나의 공식이 되었다.



내가 예매한 기차는 아침 9시 반.

그 다음 기차 시간이 더 좋았지만 거의 매진에 가까운지라 거리두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그 앞차로 예매했다.

코레일톡이나 홈페이지에서 예매 시 자리 지정이 가능하고 빈 좌석을 미리 볼 수 있어서 비교적 안전한 시간대를 예매할 수 있었다.


(글 중간 중간 볼드체의 이유는 아래...)



#scene 2. 토요일 아침, 광주행 ktx 안.



내가 예매한 기차는 광주까지 90분만에 주파하는 조금 더 비싼 ktx였다. (몇백원 더 비싸다)

용산을 출발해 익산에만 한번 서고, 그 다음이 광주역인 그야말로 급행 열차이다.

예상대로 널널한 기차가 출발하고, 평택의 너른 지대를 내달리다가 금세 익산에 도착했다.


익산에서도 예상대로 사람이 많이 타지 않았다.

그나마 같은 칸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익산에서 내렸다.

더욱 쾌적해진 공간을 보며 나는 내적 미소를 날렸다.



널널하고 쾌적한 환경.

급행이 좋긴 좋구나. 몇백원 더 낸 보람이 있다.

모든 게 예상대로 딱딱 맞아떨어지는군.



바로 그때, 나의 뇌리를 스치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아이 자리를 왜 예매했지?



만 6세까지의 유아는 오피셜리 무료 탑승이 가능하고,

빈자리가 있으면 앉혀서 갈 수 있다. 빈자리에 앉혔다고 해서 승무원이 지나다 보고 무릎에 앉히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위의 볼드 표시는 모든 게 예상 가능했던 상황이었다는 것을 지금의 내게 알려준다.

저런 강력한 사인들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너무 튼튼한 공식(ktx예매 = 유아석은 필수)이 자리잡고있는 바람에 자리가 널널해서 아이 자리를 예매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간단한 명제까지 나의 사고체계가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제일 큰 이유는 출발 일정이 계속 변경되는 상황에다 매진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

원래는 저녁에 광주로 출발 예정이었던 것이 (출장 가 있는 남편의 일정의 변경으로 인해) 결국 아침으로 잡혔고, 난 주말 기차가 매진될지 모른다는 압박과 일정에 대한 고민 등 며칠동안 자잘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 것.


익산에서 광주까지 가는 텅빈 객차 안에 단둘이 남은 30분 동안 나는 한참을 멍해 있었다.

세상 헛똑똑이가 여기있네.

정말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되는구나.


무심히도 파랗던 하늘. 비 안내리던 호남선 남행 열차



습관과 관성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 것.


고작 만원 더 냈을 뿐이지만, 금액 자체보다도 내가 이렇게 관성대로 꽉 쥐고 놓고있지 못한 생각이 또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행 내내 골똘해지곤 했다.



#scene 3. 월요일 저녁, 용산행 ktx 안.


어쩌다 전주 여행을 하게 된 엄마 (엄마도 나 못지 않게 즉흥적이다!) 와 서울로 올라오는 시간을 맞추느라

아이와 둘이 기존에 예약했던 기차를 취소하고 다른 시간에 표를 끊었다.


원래 올라오려던 시간대의 기차는 매진이 되어서 엄마와 같이 올라올 수 없었기에 그 다음 시간으로 변경한 것이다.


그 다음 시간 기차의 좌석을 확인해 보니 꽤 널널했다.

이정도면 이전 기차보다 거리두기도 가능하겠고, 엄마와 마주보는 좌석으로 3자리 끊으면 90분간 도란도란 올 수 있겠다 싶었다.


우리는 엄마와 같이 저녁을 먹고 기차를 타기 위해 남원에서 일부러 전주까지 이동해 왔다.

전주역에서 같이 기차를 타고 오송쯤 왔을때 내가 며칠 전 하행 ktx에서의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엄마, 우리 광주갈 때 유아표를 괜히 끊었지 뭐야.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


그때 엄마가 말했다.


그럼 지금 가는 표도 그냥 끊지 말지.
니 뒤에 봐봐.






엄마와 아이는 순방향, 나는 역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기차 내에서 뒤를 살필 수 없었지만,

뒷 자리가 텅텅 비었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왜일까요?

오전에 코레일톡에서 예매할 때 보았거든요. 텅텅 비었던 객차를.



남원에서 오려는 표를 취소하고 엄마와의 표를 예매하는 일련의 과정.


카드 등록을 다시 하고 신용카드 번호를 다시 입력하고 환불이 제때 되지 않는 등의 자잘한 스트레스 상황이 다시 주어지고, 여기에 저녁에 아이에게 무엇을 먹여야 하는가 등의 선택이 산재한 가운데 또다시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1. 남원에서 올라오는 표는 거의 매진이라 유아석까지 반드시 두 자리를 했어야 했다


->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2. 일정이 변경되어 엄마의 표를 추가하는 과정에서 객차가 널널한 다른 시간대로 옮겼다.


그럼에도 나는 유아석까지 그대로 3장을 예매함.


->화려한 관성이 나를 감쌈






물론 내가 하는 모든 결정이 늘 최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한 것은 뼈아프긴 하다.. 2만원을 날린 딸을 위로하던 엄마의 표정이란..)



그리고 내가 애를 써서 루틴이나 환경, 습관을 만드는 과정이 결국에는 자잘한 결정을 무의식으로 넘기기 위함이기도 하다.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을수록 내가 무의식에 의존해야하는 부분도 많아질 것이고, 그러려면 내 무의식을 전적으로 믿어야 인지과부하를 줄일 수 있긴 하다.


그런데 이렇게 내 무의식이 하는 일들이 삐걱거린다면 어쩌지.


다다라야 하는 진실과 나 사이에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가 끼어있을지, 그리고 그런 군더더기가 모두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일 수 있다는 생각에 다다르고나니 이건 뭐 어디부터 정신을 차려야 하는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하나의 (두개 아닌가) 멍청비용 지불 에피소드를 얻은 것 정도로 이번 사건(?)은 마무리 짓기로 했다.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블라인드 사이드를 발견한 것은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바로 내가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자잘한 멍청 비용은 살면서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대신 큰 일,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전에는 잠깐 멈춰 서보기로 결심했다.


관성이 일을 제 편한대로 처리하기 전에 스트레스 상황인지 판단하고 그런 요소를 제거하자. 올바른 판단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일단 보류하자.


그리고 하나 더.

내 앞의 상황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 놓고 의견을 구할 것.






누구에게나 자신이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 사각지대를 스스로 발견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누구에게나 '레프트 태클', 즉 내 사각지대를 보호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들이야말로 솔직한 피드백으로 내가 사각지대를 볼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김호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나는 크고 작은 결정을 혼자서 하는 편이다.

타인에게 의견을 묻는다 해도 스스로 80%이상 확정한 상태이기때문에 답정너나 다름 없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뺏고싶지 않은 이유도 있고, 그게 으른의 일 처리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완전한 인간에게 친구와 가족이 있는 것은 이유가 있겠지.


관성을 깨부수는 아하! 모먼트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

와 물어보길 잘했다!할 수 있는 그런 열린 마음.



그런 의미에서 지인 여러분.

앞으로는 조금 여러분들의 시간을 뺏으면서 살기도 하겠습니다.





#멍청비용

#연결하는젬마

#관성대로사는젬마

#직장인에서직업인으로

#블라인드사이드

#사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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