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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mma Han May 28. 2024

가격을 거절해 보면 알게 되는 것들

나는 15년 간 HR, 직무 교육의 섹터에서 교육 담당자로 일을 해 왔고, 독립한 이후에도 코칭과 강의를 의뢰하거나 의뢰받는 일을 해 오고 있다.

때문에 전화 너머로 전해지는 교육 담당자 (또는 사업 담당자) 의 목소리 톤에서 은근히 많은 것을 캐치할 수 있는 능력 아닌 능력도 가지고 있다.



지금 전화 주신 이 분은 요즘 과업이 많구나.

아 이 일은 이분 담당이 아닌데 어쩌다보니 맡아서 전화하고 있구나.

윗분(?)의 의중대로 이야기하느라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못하는구나.


등의 정보는 생각보다 목소리 톤으로 전해져 오기도 하는 것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강의 의뢰의 전화가 걸려왔다.

으레 그렇듯 감사한 마음으로 감사한 태도로 전화를 받았고 전화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꽤나 고압적이었다. 아니 고압적이라기보다는 경계로 가득했다. 소개를 받아 연락을 드리지만 아직은 믿지 못하겠다, 는 톤이었다.


교육 담당자로서 일한 세월이 오래였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럴 때는 오히려 조속하고 깔끔하게 업무를 조율해서 이해관계자의 마음의 짐을 덜어드려야 하는 것이 (기대되지 않지만 스스로 세팅하는) 나의 역할이기도 했다.


일정과 시간을 조율하고 참석 인원을 확인하고, 전달 가능한 교육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서 교육 담당자와 교육생들 각각의 니즈와 톤을 확인하는데 두 세번 더 통화를 한 기억이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담당자의 경계 어린 목소리는 귓가를 맴돌았다. 강의 당일에 어쨌든 제대로 보여드려야 풀리겠다 싶었다.

강의 시간이 당초 2시간에서 콘텐츠 조율 후 3시간으로 변경되었다. 시간이 변경된 만큼 기업/기관에서 지출되는 비용도 달라질 터였다. 시간 변경에 대한 내부 승인 후 강의료를 알려준다고 했다.

며칠 후 내부 승인이 났다며 연락이 왔고 강의료를 들은 나는 아, 하고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평소 받는 강의료의 절반 수준이었고 참석 인원이 그 사이에 훨씬 더 늘어 보조 FT까지 필요하게 된 상황이었다.


이럴 때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두배, 아니 보조 FT까지 포함하면 3배 이상의 가격 인상이 필요한데 그 가격에 단독 강의라는 앵커가 걸린 이상 협상은 시간 낭비이다.


죄송하지만, 제가 그정도의 강의 사이즈에는 이만큼을 받습니다. 맡겨 주신 것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이번 강의는 맡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딱 잘라 이야기했지만, 처음과 일관된 톤으로, 감사함과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의사를 전했다.

그때였다. 내가 그간 느꼈던 모든 경계가 누그러졌던 순간.


마치 처음 통화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한껏 예를 갖추었다. 내 눈에는 아니 내 귀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안절부절했다.

"시간 당 N원입니다. 세 시간이면 N원인 셈이죠." 라고 친히(?) 계산까지 해주던 고압적인 태도가 한순간에 누그러졌다.

그러면서 해당 비용에 맞춰드리는 방법을 내부에서 논의해 보겠지만 어려울 수도 있다고 친절히 이야기했다.


가격을 제시받고 -> 내 가격을 이야기했을 때 -> 상대가 다시 논의 후 연락드리겠다, 라는 패턴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연봉협상이 그러하고 여행에서의 흥정이 그러하다.


다시 고려해보겠다는 것은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내가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담당자의 달라진 목소리의 톤과 나를 대하는 매너였다.



--------------



한 마디로 이것이다.

우리는 흔히 가치를 인식하고 가격을 매긴다고 여기지만,

반대로 가격은 가치를 인식하게 해 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바꿔 말해, 사람들은 가격을 말해주기 전까지 우리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만약 내 싯가(?)가 담당자가 제안해 준 수준이었다면, 혹은 그 가격에도 OK를 하고 억지로 강의를 강행했다면 나는 나대로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강의를 마칠 때까지 담당자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아무도 만족할 수도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세 배의 가격은 역시 무리였는지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하지만 내 가격을 말했을 때 비로소 그가 경계를 풀고 '안심했다'는 점은 나에게 즐거운 공부가 되었던 기억이다.


나의 높은 가격을 보고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정확히 반대이다.

나의 높은 가격을 보고 사람들은 안심한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간판 없는 가게가 많다.

간판도 없는, 인테리어에 신경쓰지도 않는 듯 한 파스타 가게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얼른 메뉴와 가격을 본다.

다른 곳보다 20~30% 높은 가격이 써 있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더 저렴한 곳으로 가거나,

이 가격이 말해주는 가치를 기대하며 주문을 하거나.


당신의 고객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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