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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Dec 21. 2016

[TAI] #3. Whitney Museum (1)

2016.12.12(CHAPTER.3): Art Inspiration 3

20세기 현대 미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미술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전시하는 휘트니 미술관은 1982년 백남준 비디오 아티스트의 주요 전시회를 개최하고 현존하는 미국 미술가들의 작품에 바치는 첫 번째 뉴욕 미술관이다. 맨해튼의 명소 하이라인과 허드슨 리버 사이 미드패킹(예전에 정육 시장으로 자리 잡았던) 디스트릭트에 2015년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1937~)가 새로 설계하였다. 강물과 공원, 그리고 파워풀한 산업적인 구조물과 흥미롭게 사람들이 한 데로 만날 수 있는 이곳은 새로운 빌딩과 예술의 경험으로 집중하게 된다. 교육센터와 최첨단 교실 및 영화, 비디오, 아웃도어 갤러리와 함께하는 공연 등을 위한 다용도 블랙박스 극장과 실험실, 도서관 독서실 등을 포함하고, 꼭대기 층 오픈된 곳에는 카페, 1층에는 리테일 샵과 레스토랑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휘트니의 업타운 빌딩에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8년 동안 개최하고 있으며 장기계약으로 확장될 전망이다. (휘트니의 멋진 외관은 공식 사이트 참조)


오늘도 동행한 미술잡지 기고가 빌 아저씨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렌조 피아노는 강렬한 비대칭적인 형태로 디자인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 투자자는 뉴저지와 허드슨 강 쪽을 보고 오픈 형태로 짓자고 하였으나, 건축가 렌조는 보다 현대적이고 조소적인 현현을 주장하면서 아름다운 뉴욕 시내의 빌딩 옥상들이 산업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며 뉴욕 빌딩들의 특징인 옥외 비상계단의 영역과 하이라인 철길을 예술적으로 포함하면서 이 건물의 동쪽으로(현재와 같은 방향의 구조로) 설계하였다. 여전히 꼭대기층에서 허드슨 강 너머로 뉴저지가 보이며 남쪽으로는 자유의 여신상과 프리덤 타워가 보인다(아래 사진). 빌은 2011년부터 2014년 뉴 휘트니 빌딩이 완공되어가는 모습을 첼시 그의 집에서부터 허드슨 강을 따라 매일 조깅하면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했다.


꼭대기층에서 본 맨해튼 남쪽. 왼쪽 건물이 멋있어서 찍어봤다.


#3.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 Portraits

휘트니 미술관과 자화상


8층의 새로운 전시는 단순한 색채를 사용하고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보여주는 여성 쿠반 아티스트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었는데, 오늘 감상할 것은 따로 있어서 과감히 7층으로 내려갔다(혹시 관심 있으신 분은 1월 2일까지 50점의 개인전 ‘CARMEN HERRERA: LINES OF SIGHT’). 전적으로 빌의 개인적 견해인데, 휘트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엄이지만 가끔-아니 자주- 이해할 수 없는 현존 화가들의 작품들도 사들이고 걸리고 한다며 꼬장꼬장거렸다. 이 화가가 주목받는 이유를 여성이고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며 사회적 문맥 속에서 찾았는데, 그것도 사실일 테지만, "제프 쿤스같은 멍청이를..."하는 귀엣말 속에서 지금까지 그를 두 번 만났지만 취향을 조금 가늠할 수는 있었다. 빌과 취향을 같이하는 사람에겐 쿠퍼 휴잇 디자인 박물관과 미디어아트가 주를 이루는 모마 PS1은 추천하지 않는다. 하하.



‘HUMAN INTEREST: PORTRAITS FROM THE WHITNEY’S COLLECTION’ 


작년 <America Is Hard to See> 전에 이어 올해 <Americans Are Strange to Look At> 전을 선보이고 있는데 웃기면서 이상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하고, 미친 듯이 기괴하거나, 위험할 정도로 이상하며, 불가사의한 작품 250여 점이 이곳 휘트니 미술관에 두 층에 걸쳐 2017년 2월 12일까지 전시한다.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 1904-1948)


고르키는 알마니아에서 7세 때 이민 온 화가로 아버지가 (알마니아인들을 학살하는) 터키 군에 징집되면서 군 복무를 피해 가족 모두 이주 당시 어머니가 아사로 죽고 불우하게 컸다. 보스턴 뉴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공부하다 뉴욕에서 세잔느와 피사로의 영향을 받았으나(인상주의) 후에 차차 미국 추상표현주의(후기 인상)에 스며들었다. 그랜드 센트럴 아트 갤러리의 에드먼드 그레첸은 그에게 그랜드 센트럴 미술학교에서 강의를 맡겼고 그는 제안을 받아들여 파트타임 강사가 되었다. 고리키는 후에 앨리스 닐, 잭슨 폴록, 디에고 리베라, 마크 로스코 같은 아티스트들이 소속된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Federal Art Poject에 고용된 첫 아티스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고르키는 허풍도 심했다는데, 자기가 막심 고리키 친척이라면서(물론 아님) 헛소리를 하고 다녔다. 고르키의 곡선은 나중에 드 쿠닝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이 영감을 어디서 얻었나요?"라는 한 기자의 물음에 쿠닝은 "맨해튼 XX가요.(고르키의 주소)"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고르키의 말년(1946년)은 그의 작업실이 불타 작품이 없어지며, 암수술을 받고도 화필을 놓지 않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 교통사고로 목뼈가 부러져 그림을 그리던 팔이 임시로 마비가 되었고, 게다가 아내가 그의 친구와 함께 그를 떠나자 대단히 상심하여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Arshile Gorky's The Artist and His Mother (ca. 1926–1936)


이 그림은 지난번에 처음 만난 미술 애호가 빌이 침을 튀기며 설명하면서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고르키의 작품 중 하나로서 어머니와 자신의 초상을 남긴 것인데, 실제로 보면 여자 옷의 밝은 부분은 연한 분홍색으로 매우 아름다웠다. 채도가 낮은 오묘한 색상들의 조합은 스산하고 처연하면서도 두 사람의 커다랗고 퀭한 눈 그 고요하고 침착함 속에서 절규하는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다채로운 코트의 신비로움이 남아있으면서도 거친 붓터치가 남겨놓은 키네틱 에너지는 정동감의 대조를 이룬다. 그리운 어머니의 손 부분, 최소화한(minimal) 배경 등 여러 번 그리고 덧칠하여 지우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작화 실력이 있음에도) 결국 두 손을 뭉뚱그리는 결정을 한 것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력감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1950년대 -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는 미국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것으로,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 영향을 주게 된 첫 번째 예술사조이며, 동시에 뉴욕을 파리를 제치고 전 세계 예술의 중심지가 되게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는 1946년 예술평론가인 로버트 코테스(Robert Coates)가 처음으로 미국 예술에 대해서 적용하였지만, 용어 자체는 1919년 잡지 Der Sturn에서 독일의 표현주의 예술을 설명할 때 이용되기도 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감성적인 강도(emotional intensity)를 강하게 나타내며, 독일 표현주의에서 볼 수 있는  자기부정(self-denial), 여기에 추가적으로 반항과 반정부적인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보통 주로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 예술가들 중에서 스타일은 상당히 달라도 이런 전반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작가들을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분류한다.  예를 들어, 폴록의 경우 에너지가 넘치는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 유명한데, 그의 작품이 언제나 보여주는 바쁜 느낌은 기괴한 여성의 시리즈로 유명한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이나, 색상의 사각형으로 유명한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들과는 기술적으로나 미적으로 상당히 다르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추상표현주의는 와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같은 20세기 초의 러시아 예술가들과 스타일이 유사한 점이 많다.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의 경우 많은 경우 자발성(spontaneity)의 인상을 주지만, 실제도 작품 자체는 치밀한 계획을 거쳐서 제작된다. 1950년대에 추상표현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에는, 1930년대부터 대공황과 멕시코의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미국에서 시작된 사회 현실주의(social realism)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의 정치환경 변화에 따라 그림을 통해 표현하기 어려워지게 된 것에 영향을 받았다.  구체적인 표현이 사회적 탄압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표현이 추상화가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2차 대전 직후의 매카시즘(McCarthy era) 시기의 미국은 예술에 대한 강한 검열이 있었던 시기이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생각을 최대한 추상화하여 비정치적으로 보이도록 포장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화가로는 아쉴리 고르키(Arshile Gorky), 프란쯔 클라인(Franz Kline), 한스 호프만(Hans Hofmann),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잭슨 폴록(Jackson Pollick)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며, 조각가로는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와 그의 아내인 도로시 데너(Dorothy Dehner), 이사무 노무치(Isamu Noguchi), 이브람 라소(Ibram Lassaw), 테어도어 로스작(Theodore Roszak), 메리 캘러리(Mary Callery), 루이스 보거이스(Louise Bourgeois) 등이 대표적이다. 많은 조각가들은 1951년 뉴욕의 9가 거리 동쪽에서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가 큐레이션을 맡은 "Ninth Street Show"에 참여를 하였다. 화가와 조각가들 이외에도 프랭크 오하라(Frank O'Hara)와 같은 시인이나 아론 시스킨드(Aaron Siskind), 프레드 맥다라(Fred McDarrah)와 같은 사진작가들,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와 같은 영화제작자들도 추상표현주의 작가들로 볼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를 가르치는 학교들이 미국 내에 빠르게 퍼져 나갔지만, 현재에도 스타일의 중심지는 뉴욕과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이다.

1950년대 서정추상주의 (Lyrical Abstraction)

서정추상주의(Lyrical Abstraction)는 포스트-워 현대회화에 있어 2개의 관련되지만 분리된 운동이다. 유럽서정추상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추상주의를 어떤 예술평론가들은 전후 폐허가 된 파리를 다시 복구하기 위한 노력의 시도로 보았고, 일부는 파리와 미국에서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으로 대표되는 표현추상주의와 경쟁을 하기 위한 운동으로 보았다.  

서정추상주의는 그 이전에 발달한 큐비즘이나 초현실주의와 적대적이었는데, 추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딘스키(Kandinsky)의 철학을 많이 따르고 있다.  서정추상주의 작가로는 Jean Le Moal, Gustave Singier, Alfred Manessier, Roger Bissière, Wols 등이 꼽히며, 조지 매튜(Georges Mathieu)가 Palais du Luxemboug에서 1947년 "Abstraction Lyrique"라는 전시회를 열고, 뒤이어 "HWPSMTB" (Hans Hartung, Wols, Francis Picabia, Francis Stahlym Georges Mathieu, Michael Tapie, Camille Bryen) 전시회를 1948년에 열면서 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조는 1957년 후반 정도까지 비교적 짧게 유행을 하였다.  이후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와 입스 클라인 (Yves Kelin)으로 대표되는 신사실주의(New Realism)로 연결된다.

미국에서는 서정추상주의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워싱턴 DC 등을 중심으로 1960~70년대에 유행을 하게 된다. 이 당시의 작품들을 보면 직관적이면서 자발적인 표현과 다소 몽환적인 공간, 아크릴 염색의 이용, 그리고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접목한 작품들이 많다. 1960년대 당시 유행하던 미니멀리즘(Minimalism), 포멀리즘(Formalism), 팝아트(Pop Art)나 기하추상(Geometric abstraction)과 같은 스타일에 반감을 가지던 예술가들이 중심이 되어 보다 실험적이고, 회화적이면서, 표현력이 뛰어난 추상화 스타일을 추구하면서 유행을 하게 된다. 많은 수의 작가들이 미니멀리스트(Minimalist)였고, 이들의 작품들이 대중적이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추상회화의 모티프(motif)를 가지게 되는 방식으로 발전을 하였다. 미국 서정추상주의는 그 정신적인 측면은 1940~50년대의 추상표현주의, 컬러필드회화(Color Field paiting) 등과 맥이 닿아있다. (출처: wikipedia)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


호퍼의 자화상 옆에는 젊은 시절의 핸섬한 그의 또 다른 자화상과 그 그림이 걸려 있을만한 방의 내부 그림이 있었다.

빌은 그의 작품세계에서는 내용과 분위기를 넘어서는 미학적인 내러티브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낮은 언덕은 흥미롭다. 프랑스 미술에서의 내부적 공간(interior) 같은 경우는 폐쇄적이고 상습적이고 관행적인 공간인데 반해 '미국적 공간'이라는 것은 그 황량함과 열린 공간 속에서 인간이 만든 최소한의 것들(액자, 침대, 창문) 등을 구상하고 배치하여 작품 프레임 밖으로 공간의 확장이 계속된다. 홀로 자고 난 다음날의 아침 햇빛을 전라로 고독하게 맞는 고요함은 처연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드 쿠닝은 초현실주의(surrealism) 방법을 주로 형태적으로 변형(deformation)하는 차원에서만 수용하는 한편, 액션 페인팅의 기수로 자유분방한 필치를 휘둘렀다. (존잘님 큰절.. 아 너무 자유롭고 표현주의적.. 개천재네ㅜㅜ)                                          오른쪽은 팝아트적인 Response Art




The Screen Porch (1964)

Fairfield Porter (1907-1975)


사실주의적 화가인 포터의 스크린 포치는 여름휴가 동안 지낸 메인 주의 작업실에서 작업한 색다른 가족 초상화이다. 그의 두 딸과 그와 공개적으로 사귄 James Schuyler라는 저명한 영국 시인,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전경에서 바라본 작가의 관점인 반면 포터의 아내인 Anna가 창문 바깥에서 안쪽을 바라보고 있어, (실제로 넷이 같이 살았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긴장을 한 화폭에 담아내었다.


편편한 회화풍을 적용했음에도 명확한 얼굴 표정을 그려내어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관계를 잘 느낄 수 있다. 특별히 교차한 시선으로 이루어진 이 구성은 "The Four Ugly People"이라 일컬으며 비전통적인 가족 구성내의 긴장을 반영하고 있는 특성이 된다. 아내는 남편의 게이 연인인 제임스를 응시하고 첫째 딸은 두 손을 모으고 앞을 응시하고 있으나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둘째 딸은 뒷모습으로 묘사되어 아직 현실을 지각하지 못하고 있으며, 후에 정신의학적인 고통을 겪었던 제임스는 화가가 있는 (관객 쪽으로의) 방향으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가족동적화(Kinetic Family Drawing)


이 작품을 보다 보니 가족동적화(Kinetic Family Drawing)가 생각났는데, 그림을 통해 본인과 가족 구성원 서로의 상호작용에 대한 일말의 암시와 징후를 언어를 쓰지 않고도 가족역동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투사적 진단 기법이다. 미술치료에서 "이렇게 이렇게 따라서 그려주세요."라고 요청하는 설명(instruction)을 지시(Directive)라고 하는데, 가족동적화(KFD)의 디렉티브는 주로 어린 시절(5-7세)에 기억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종이 한 면에 그리도록 한다(R-KFD). 미술치료사의 적절한 질문과, 그림에서 보이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 그리고 있는 행위 동안(과정)의 관찰을 종합해보는 결과로, 진단과 상담에서 어떠한 단서를 제공하여 가족 문제에 도움될 수 있다. 물론 개인의 문제도 가정에서의 의사소통 유형이나 가족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아동의 경우, 사람을 그리는 것이 어렵다면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로 어항 안에 담긴 물고기화를 그려보게 할 수도 있다.

[참고: HTP(House-Tree-Person) 진단이 있고 KHTP(Kinetic-HTP) 기법이 있는데, 후자는 각각 그렸던 집-나무-사람을 통합하여 한 페이지에 세 요소를 다 그리게 되는 것이다]


RKFD Sep 2015



My Egypt (1927)

Charles Demuth (1883-1935)


찰스 더무스는 미국의 화가이자 삽화가로, 1920년대 Demuth가 친구들과 동료 화가들을 묘사한 굉장한 '포스터 초상화'라는 시리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신체적인 닮은꼴을 포착하는 것 이외에 진부한 오브젝트의 정렬들을 광고의 발랄한 양식으로 만들어 주제의 특성을 전달하고자 했다.

빌이 보여준 이 작품 '나의 이집트'는 그 시리즈는 아니지만 같은 시기에 제작한 것으로, 그의 개인적이면서 예술적인 관점을 상징적인 전문용어로 정제하여 아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낸다.

그가 살던 펜실베이니아의 대평야는 곡식을 저장하던 대형 곡물창고들이 있었는데, 마치 그 구조물들이 고대 피라미드와 같은 느낌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Demuth는 이 작품을 통해 미국식 산업 효용성을 전달하면서 동적으로 기하학적인 양식으로 발전시키는 소명의 정상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소 가슴 아프게 모방하고 있는 것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사실 Demuth는 병으로 쇠약해져 랭캐스터(Lancaster, Pennsylvania)의 집에 틀어박혀 갇혀 있는 동안 이 작품을 완성하였는다. 이같이 비자발적인 속박의 장소로서 '그의' 이집트라고 명명된 이미지가 그의 고향을 이집트의 성서적인 내러티브로 연결시키고 있다. 미술치료적으로 해석해본다면 이것이 Demuth의 집, 은신처, 동굴, 성소인 것일까? Met(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도 그의 작품들이 몇 점 전시되어 있다.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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