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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Aug 03. 2016

3. 어딜 가나 경계 인간, 미술 포트폴리오

2014.08.03

2012년 12월에 졸업학점을 채워서 심리학과 수업을 모두 끝냈는데, 학적상 졸업은 다음 해 2월이며 졸업식은 6월이었다. 작년 1월부터 4월까지 타 미술대학교에서 도자공예 수업을 마지막으로 들어서 미술치료 석사과정 진학에 필요한 미술실기 선수과목을 끝냈다. 5월 말까지 짐을 꾸리고 방을 빼고, 6월 5일까지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짐을 한국으로 보내고, 6일에 졸업식을 갔고 친구들과 작별 파티를 하고, 7일에 캐나다에서 출국했다. 대학 졸업반이 으레 그렇듯 진로에 대해 무척 고민이 많았다. 아니, 스물넷에도 사실 별달리 고민하고 그러지는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고 삶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해서, 서른을 훌쩍 넘으니 결혼은 점점 밀린 숙제처럼 여겨지게 되고 X 년 넘게 살았어도 이민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차라리 그게 나은가 싶었다.


일단 캐나다에서 졸업 후 취업비자로 1-1.5년을 더 일하면서 포트폴리오도 준비한 후 영주권 신청-취득 한 다음에 북미의 대학원으로 들어갈까 생각했다. 영주권자는 학비가 더 저렴하고 또 그간 학비도 모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까지는 사실 너무 많은 선택지를 열어두고 내 삶을 여유 있게 순간순간 즐기듯 살아오다 보니 이제는 좀 더 늦기 전에 얼른 목적지향적이 될 필요를 느꼈다. 캐나다에서의 생활방식은 기본적으로 유유자적했지만 내가 상대해오던 연령층이 노인들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시간이 많다고 나는 어리다고 은연중에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원래 나라는 인간의 생활철학이 미래지향적, 금욕적이기보다 현재를 가장 중시하고, 행복을 추구하고, 쾌락적으로 보내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어렴풋이 예전에 생각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 그러다 보니 점차 격차가 벌어져 나이에 따라 기대하는 발달과업을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San Francisco l Jun 2013 © JUNE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해줄 수도 있다고, 이런 식으로 극복하기로 했다. 말하기는 쉽지만, 남들의 삶과 비교를 하지 말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거든. 어찌 되었건 20대 후반에 북미로 가서 X여 연차에 다시 한국사회로 돌아왔더니 한동안 역문화충격에 시달리느라 고생을 꽤 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시민의식이 그립기도 했지만, 반대로 나 자신이 급격히 변화한 사회에 좇아가기 힘들어한 면도 많았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한국에 비하면 캐나다는 정체되어 있는 기분이었고 나는 내가 한국을 떠났을 때의 그대로인 사회적 연령이라 여겨져서, 20대 때의 친구들의 모습과 지금 모습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이것은 처음에 캐나다의 교포 문화를 접했을 때 더욱 깨달았던 것인데 장기체류를 할수록 그 정서가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또 다음에 하기로 하고 다시 돌아와서.. 두 번째 방안은 졸업하자마자 바로 돌아와 한국에서 포트폴리오 및 기타 진학 준비를 하고 미국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3년 오픈 취업비자를 가지고 있던데다 1년 경력만 더 있으면 영주권 취득이 쉽기는 하지만 (한국 나오기 전까지도 딱히 이민 생각은 없었고), 어차피 미국대학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면 얼른 끝내고 자리를 잡으라는 의견이 있어 후자를 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취업하면 계획한 공부도 기약 없이 더 멀어지고 안 올 것 같았으려나? 부모님으로서는 과년한 딸의 혼사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4월에 이러한 고민을 끝내고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어차피 5월 말에 홈셰어 프로그램이라는 인턴십의 일종으로 계약된 방이 만료가 되어 이사를 나가야 했다. 두 번째, 여동생의 결혼이 10월에 있어서 어차피 들어와야 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도 일 년 만에 재회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3월에 들어온 열두 살 많은 직장 동료가 있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더 넓게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쯤이면 떠날 때가 되었다..라는 생각에 미치자 바로 비행기표를 사고 한국의 살 집과 포트폴리오 학원 정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북미나 유럽도 찾아보면 개인과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희소성이 높아 역시 부르는 게 값. 캐나다에서는 아무래도 사교육보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포트폴리오 준비반이 있긴 하더라. (영국도 있는 듯)


입시미술을 준비한 적이 없는 나는 도저히 감이 안 와서 처음에 캐나다에서 미리 H대 앞 학원에 잠시 등록했다. 미술학원은 초등학교 이후 처음 가보았는데, 그곳에서 다른 미술치료 진학 준비하는 사람들을 꽤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배우는 것에 비해 상당히 비싸다고 느껴서 곧 아예 직접 발로 뛰며 찾아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기존 작품을 추려서 해방촌에서 작가 활동하시는 분에게도 찾아가서 코멘트를 듣고, 아트 그룹스터디 교습하는 이태원의 스튜디오(이곳은 밋업사이트를 통해 외국 아티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에도 가보고, 또 강남의 다른 유학 전문 미술학원에도 포트폴리오랍시고 들고 가서 완성도에 대해 문의해보았다. 미술치료로 특화되어 있는 곳이 아직 거의 없었고, 석사 포폴은 학부/편입 수준과는 달리해야 한다는 둥 말들이 다양했다. 물론 이에 대한 것도 학교에 직접 물어보면 더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학교마다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므로 포트폴리오도 그에 맞게 준비하면 좋을 것이다.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스타일이 견고하고 명확하면 괜찮을 것 같다. 다양한 재료를 써서 표현해도 좋고 내가 자신 있는 도구를 사용해도 좋다. 대부분 미대 실기수업 때 과제로 했던 작품을 활용했기 때문에 풀타임으로 만 5개월 정도 집중하여 작업하고 마무리를 했다. (나중에, 합격한 학교들의 학과장들에게서 포트폴리오가 좋다는 피드백을 들어서 솔직히 놀랍고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초에 포트폴리오용 사진을 촬영했는데 이것도 쉽지는 않았다. 사진을 잘 찍는 가까운 친구들은 부산에 있었고, 내 작품들이 대부분 사이즈가 크고 무거운 입체 작도 있어 옮기기도 어려운데다, 사진사의 마무리 그래픽 실력은 불만족스러워서 내가 다시 손을 다 봐야 했다. 서울에 포트폴리오 촬영 전문으로 아는 사진사가 있지도 않아서 자격증용 증명사진을 찍으러 들어갔다가 그분께서 출장 작품 촬영도 한다고 하셔서 부탁했던 것이다. 12월 초, 흐린 일요일에 내 작업실 겸 자취방은 너무 좁아서 촬영 거리도 안 나와 벽 끝에 유화 캔버스를 놓고 보니 조명 빛에 반사되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결국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데 결과물이 과히 좋지도 않아서 혼자 옥상과 복도로 캔버스를 옮기고 자연광에 내 카메라로 다시 찍고 보정하였다. 큰 창이 있는 원룸 스튜디오였지만 작업대 하나 만이 겨우 들어가는 우울함과 지리멸렬함이 배어있는 곳이었다. 서울의 겨울은 캐나다의 겨울보다 외로웠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미술을 할 때와는 또 달리, 정말 창작에의 고통이라는 것을 느끼며 혼자 헤매면서 의무감으로 단기간에 작업해야 했던 어려움도 이번에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즐거움이었던 미술이,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마 그건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몰입과정의 즐거움을 놓치고 잘해야 한다, 완벽해야 한다 라는 압박감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도착할 곳은 있는데, 폭풍이 불기 전에 키잡이 없이 부표 없이 태평양을 항해하는 듯한 마음. 컨펌 계속 받고 광고주대로 변형시켜나가야 하는 디자인을 하다가 내 멋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그런 것에 대해 너무 불안해했다. 나 자신을 찾는 것(스타일을 구축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Bucheon l Dec 2013 ©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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