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썸준 Jul 09. 2019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 Day1

가고시마 한 달 살기 프로젝트, 드디어 대여정의 서막이 오르다

2019.3.19 (화)


드디어 그동안 준비하고 고대해왔던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여정이 시작되는 첫날이 밝았다. 오늘 가고시마로 향할 비행 편(KE785)은 아침 8시 45분. 새벽부터 일어나 전날 싸놓은 자전거 캐링백과 대형 캐리어를 양손으로 이끌고 공항철도에 몸을 실었다. 

새벽 공기가 아직 찼지만, 새로운 모험을 향해 다가가는 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고, 지금의 일본이 있게 된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다는 가고시마는 어떤 곳일까, 그곳 사람들의 문화나 라이프스타일은 어떨까, 얼른 가서 몸소 부딪히며 그들을 알고 싶다, 헉헉대며 자전거도 제대로 타보고 싶다라는 기대가 가득하다가도, 부족한 일본어로 가서 잘할 수 있을까, 혼자 자전거 타다가 무슨 일 생기진 않을까라는 걱정도 동시에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공항에 도착 후 티켓팅 및 입국 심사를 마친 다음, 라운지에서 가볍게 허기를 달랜 후 가고시마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예상외로 빈자리가 많았는데,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고 골프나 온천 여행을 하러 가시는 어르신들만이 군데군데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이륙을 안내하는 기내 방송이 있은 후 얼마 안 있어 비행기가 활주로를 힘차게 딛고 이륙하였다. 

창문 밖을 내다보며 이번 여행의 목적에 대해 다시 한번 스스로 상기해보았다. 가고시마를 여행지로 선정한 이유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지만, 나의 여행 목적은 일본 문화와 일본인 라이프스타일 관찰이지 역사 유적 탐방을 통한 역사 지식 배양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혹시나 내가 메이지 유신 혹은 메이지 유신을 이끈 가고시마 출신 인물에 대한 역사적 배경 지식이 얕기 때문에 오히려 박물관이나 역사 명소를 돌면서 역사 지식을 쌓으려는 쪽으로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도 있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박물관을 방문하더라도 중요한 건 박물관 전시 내용보다는 그 박물관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의 이용행태를 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에 더 맞다는 것이다. 


비행기는 어느덧 일본 규슈 상공을 날고 있었다. 이륙 후 한반도는 두꺼운 먼지층으로 아래가 전혀 내려다 보이지 않았는데, 하늘이 장난이라도 치 듯 대한해협 넘어 규슈의 하늘은 맑고 아래 지역들은 선명하게 보였다. 요즘 미세먼지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같은 날 같은 하늘이지만 대기에서도 왠지 양국 간의 국력 차이를 보는 거 같아 왠지 씁쓸했다. 이럴 때일수록 일본에 대해 더 알고 배울 것이 있다면 부지런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여행에 대한 전의가 다시금 불타올랐다.


약 1시간 반 정도의 비행 끝에 가고시마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 승객이 많지 않아 입국 심사가 오래 걸리진 않았고 수하물 벨트에 도착했을 땐 이미 직원이 자전거 캐링백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자전거 캐링백을 열어 간단하게 바퀴 소독을 한 후, 나머지 캐리어를 찾아 입국장으로 나와 공항 보안 요원에게 가고시마 웰컴 월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부탁한 후, 가고시마 시내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 탑승장이 있는 국내선 청사 쪽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어가 부족한 내 입장에선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 시 버스보단 이정표 안내가 좀 더 명확한 기차 이동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가고시마 공항에는 기차역이 없어 시내로 이동하려면 리무진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버스를 타서 호텔이 위치한 텐몬칸으로 가는 게 어떻게 보면 나에게 주어진 가고시마에서의 첫 미션인 셈이었다.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타는 곳은 2번 승강장이라고 알고 있어 그쪽으로 이동하니 이미 버스가 출발 대기 중이었고, 버스 옆에 서 있는 직원에게 텐몬칸으로 가는지 여쭤보니 맞다고 하길래, 버스 옆에 짐을 놓고 표를 끊으려고 티켓 머신으로 황급히 향하였다. 안 그래도 버스가 출발 직전이라 빨리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데 구간별로 금액이 다르게 적혀 있고 온통 한자라  '天文館(텐몬칸)'이라는 글자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보니 머신 옆에 안내 창구가 있어, 텐몬칸 1장 부탁드린다고 외치니 나이 지긋하신 직원분이 표 한 장을 내주셨고, 그 표를 받아 직원분과 같이 짐을 실은 후 마지막 승객으로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정확히 다는 못 들었지만 출발 직전에 직원이 기사님에게 텐몬칸~지텐샤(자전거)~라고 리마인드 성 말을 건넨 걸 봐선 버스를 제대로 타긴 탔구나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나왔다. 

 

버스 창문 밖 너머로 보이는 가고시마 하늘은 맑고 산림은 푸르렀다. 텐몬칸 도착 후 일정을 어떻게 운영할지 한번 더 점검하였고 약 1시간 정도 지난 후에 마침내 텐몬칸에 도착하였다. 

버스 하차장 건너편 상가 아케이드 위에 '天文館'이라는 글자가 있는 걸 확인한 후 비로소, 진짜 텐몬칸에 왔구나,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공항 리무진 버스 하차장에서 이번 한 달 여행 중 약 3주를 묵을 곳인 아파(APA) 호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직 체크인 가능 시간(오후 3시) 전이라 수속만 밟은 후 호텔에 캐링백과 캐리어만 맡겨 놓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호텔 직원이 마치 이런 일은 처음 있다는 표정으로 24일 동안 묵는 것이 맞느냐라고 하길래, 한 달 동안 자전거 라이딩 예정이다라고 하니 신기해하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히 응대해주었다. 한 호텔에서 3주 이상 묵는 장기 투숙객이 드물뿐더러 그 대상이 한국인이고 게다가 자전거를 탄다고 하니 내가 그 직원이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본격적으로 텐몬칸 주변을 둘러보기 전에 식사를 먼저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호텔 직원에게 돈카츠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하였다. 가고시마는 5 흑(黑)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흑돼지, 흑소, 흑계, 흑초, 흑설탕이 그것으로, 그중에서도 우리가 횡성 하면 한우를 떠올리는 거처럼, 전국적으로 가고시마 하면 돼지를 연상할 만큼 흑돼지의 맛과 육질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여행 중에 돼지 관련 음식을 다양하게 먹어봐야겠다고 계획했던 터라 첫 스타트로 돈카츠가 좋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소개받은 곳은 호텔 바로 옆에 위치한 아지모리(あぢもり)라는 곳으로, 국내 여행 책자나 블로그에도 소개됐던 곳이라, 이 곳 흑돼지 돈카츠 맛은 어떨까라는 기대를 안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 추천을 받아 포크 로인 커틀릿 (Pork loin cutlet)을 주문했는데, 바삭한 튀김과 부드러운 육질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먹어봤던 돈카츠와는 달리 돼지고기 끝에 비계가 달려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앞으로 그런지 계속 봐야겠지만, 가고시마 지역이 더운 바닷가 지역이라 음식이 전반적으로 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과 달리 맛이 밋밋했던 것이 의외였었다. 가고시마에서의 첫 흑돼지요리, 첫 스타트부터 감이 좋았다.                                          

식사를 한 후, 가고시마 시내뿐만 아니라 가고시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쿠라지마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로야마 전망대에 가보기로 하였다. 시로야마 전망대로 가기 위해서는 텐몬칸 거리를 지나야 하는데, 지나는 길에 무자키(팥빙수), 아게타타야(사쓰마어묵), 후쿠만(라멘), 마츠모토 키요시(드러그스토어) 등 방문하려고 계획했던 곳들이 눈에 띄여 왠지 모르게 반갑게 느껴졌고, 호텔과 가까운 곳에 밀집해있어 효율적으로 이동하면서 둘러볼 수 있을 거 같아 여행의 첫 단추가 잘 끼워지고 있는 거 같은 왠지 모를 흡족한 느낌도 들었다. 텐몬칸 거리 쪽에 위치한 가게 앞에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 있길래, 뭐하는 곳이지 보니 'Korean Style 핫도그 가게였다. 해외에 나오면 애국자가 된다고, 한국 음식을 먹으려고 줄 서 있는 어린 일본 친구들을 보니 가고시마에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있긴 있구나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리를 벗어나자 시로야마(城山)와 왼편에 우뚝 서 있는 시로야마호텔이 눈 앞에 들어왔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시로야마'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무게감과는 달리 산 높이가 그리 높진 않았지만 산 정상에서 시내 전반을 조망하기에는 높이가 충분해 보였다. 시로야마 바로 아래에는 엄청난 규모의 도리이가 있었는데, 데루쿠니 신사(照國神社)의 그것이었다. 사실 역사 지식을 배양하겠다는 역사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 위해 역사 관련 장소는 최대한 나중에 방문하려고 했으나, 전망대로 가는 길에 위치해있어 잠시 들러 보기로 하였다.


데루쿠니 신사는 에도시대 사쓰마 번의 번주인 시마즈 가문의 11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이다. 일본인들은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곳곳에 그들을 기리는 신사가 있는데, 이 곳 데루쿠니 신사는 섬기는 대상적인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가고시마 하면 메이지 유신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사이고 다카모리나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은 인물의 지역인데, 물론 중앙 집권제가 아닌 봉건제라는 당시 일본의 제도적 특성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들이 타도했던 에도 막부시대의 번주를, 어떻게 보면 지금의 일본이 있게 한 메이지 유신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부정되어야 할 이전 세대의 인물을 아직까지 존경하고 참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나라나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도 당시 리더(번주)가 개인의 사리사욕보단 지역의 발전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 기여했다는 반증일 텐데,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면서 나라나 정권이 바뀌는 거와 상관없이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경하는 지도자들은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니, 국력의 차이는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되나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데루쿠니 신사 본관에 들어가기 전에 오른편에 마련된 세수대에서 현지인들처럼 손을 씻고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가족단위 부터해서 혼자 온 직장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있었는데, 자녀를 둔 아버지는 자녀들이 건강하고 공부를 잘하기를, 정장 차림의 직장인은 본인의 성공을 빌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는 참배를 하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시마즈 가문의 문양을 바라보며 이번 여행에서 최대한 이들을 이해하고 배워서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하며 신사를 빠져나왔다. 


데루쿠니 신사 옆에 있는 시마즈가(家) 동상을 간단히 둘러보고, 시로야마 전망대로 향하는 '자연유보도(自然遊步道)' 입구에 들어섰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는 잡목과 잡풀로 뒤덮인 일반적인 동네 뒷산처럼 보였는데, 산책로에 들어서니 이 곳을 왜 '자연에서 놀 수 있는 길'이라고 명명했는지 알겠다 싶을 정도로, 자연을 흠뻑 느끼며 가볍게 산책하기 좋게 길을 잘 조성해놓았다. 산책로가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어 '속세'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을 즐기며 리프레쉬하기 좋을 거 같았는데, 우리 같았으면 그냥 동네 뒷산으로 방치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일본인들은 주어진 자원을 방치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그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구나를 이 산책로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연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수치로 산정하는 것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우리나라만큼 주거지 주변에 크고 작은 산들이 많은 곳도 없는데, 사람들이 일상생활 안에서도 자연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인프라가 조성될 수 있게 좀 더 깊은 관심과 고민이 필요할 거 같았다.

30분 정도 '자연을 즐기며 걸은 후' 시로야마 전망대에 도착하였다. 저 멀리 보이는 가고시마의 상징 사쿠라지마와 그 아래 반짝거리는 긴코만 바다,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가고시마 시가지, 그리고 가고시마와 사쿠라지마를 유유히 왕복하는 페리 등 가고시마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한눈에 조망하기 좋았다. 


아직도 화산재를 내뿜으며 활동하고 있는 사쿠라지마를 바라보고 있으니, 대자연 앞에 나도 모르게 경건해다가도 저 아래 끓고 있을 마그마를 상상해보니 나도 모르게 심장이 뜨거워지면서 주먹을 불끈 쥐게 되었다.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화산이라는 불가항적인 자연의 존재 앞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선 그것을 딛고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에도 시대 때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시마즈 번주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을 이끈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가고시마의 저력이지 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본은 어딜 가나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헛으로 놀리는 땅이 없었는데, 이 곳 가고시마 역시 빈틈없이 구획된 시가지를 보면서 자원 활용 측면에서 우리가 배울 게 많구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전망대를 둘러보고 원래는 시로야마돈 광장 쪽으로 해서 사이고 다카모리 자결지를 둘러보고 호텔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본의 아니게 시로야마 호텔로 가게 되었다. 가고시마를 대표하는 호텔답게 로비층에 사츠마 자기 및 기리코와 같은 가고시마 대표 공예품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나중에 방문할 곳들을 간략하게나마 미리 만나볼 수 있어 향후 방문에 대한 기대를 한층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1층 홀에서 지금이 기업 채용시즌인지 대학 졸업생 취업 박람회가 진행 중이었는데, 요즘 일본 대학생 취업률이 90% 후반대로 높다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전반적으로 학생들 얼굴에 여유가 있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이들을 보고 있으니 얼마 전 대학가 스터디 카페에서 봤던 취업 준비에 열중인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생각났는데, 우리도 취업 시장이 좀 풀려 20대 젊은 친구들이 스펙 쌓기와 같은 취업을 위한 삶이 아니라 어렸을 때 좀 더 진취적인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호텔을 빠져나와 시로야마 자연유보도를 따라 내려와 박물관들이 밀집해있는 거리를 지나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을 보고, 텐몬칸 상가지역을 지나 호텔로 복귀하였다. 시로야마 전망대에서의 시내 조망부터 텐몬칸 주변 지역을 크게 한 바퀴 둘러봤더니 왠지 벌써 가고시마 여행을 다 한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파 호텔은 내가 생각했던 거보다 시설 및 관리 면에서 상태가 좋진 않았다. 장기 투숙이라 호텔 선정 시 가격 요소가 가장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예전에 기타큐슈에서 묵었을 때 좋은 인상이 남아 있어 내심 가성비 좋은 호텔을 잘 골랐다 싶었는데, 시설이 노후된 건 그렇다 쳐도 일본 호텔 답지 않게 환기가 잘 안되고 먼지도 많아 청결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옷걸이 몇 개를 제외하고는 옷가지를 수납할 공간도 없어 나 같은 장수 투숙객에는 적합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3주 동안 어떻게 있지, 그냥 돈 좀 더 쓰고 좋은 곳에서 묵을 걸 그랬나 하다가도, 그래도 방 크기가 넓어 자전거 놓고 캐리어 펼쳐 놓을 공간이 되는 게 어디냐, 내가 여기 휴양하러 온 것도 아닌데 그냥 적응하자라며 혼자 궁시렁대면서 짐을 풀기 시작하였다. 

 

짐 정리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샴푸, 샤워타월 등 생필품을 구매하기 위해 이온(AEON)이라는 대형마트가 위치한 가고시마 중앙역 주변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거리에는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 뿐만 아니라 퇴근 시간 무렵이라 직장인들로 북적거렸는데, 내가 갖고 있던 일반적으로 무미건조해 보이는 일본인 이미지와 달리 메이지 유신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서 그런지 이곳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활력이 넘쳐 보였다. 


이온에 들어가려다 길 건너에 아뮤플라자가 보이길래, 내부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봐 두는 게 향후 일정 짜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 온 김에 먼저 둘러보고 나오기로 하였다. 플라자 안에는 쇼핑몰뿐만 아니라 영화관, 서점, 피트니스 센터, 미용실, 푸드코트 등 다양한 시설들이 입점해있었는데,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아 현지인 소비문화나 라이프 스타일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기 딱 좋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실내를 둘러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재밌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왼쪽 편에 서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우측통행을 실시하면서 에스컬레이터 우측 편에 서 있는 게 자연스러운 거처럼, 일본은 좌측통행이라 이들에게는 왼쪽 편에 서 있는 게 당연했던 것이었다. 괜히 혼자 외국인인 거 티 냈다며 머쓱해하며 조용히 왼편으로 이동하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오른편에 서있으면 외국인일 확률이 높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보며 이온으로 이동하였다. 


상품 진열 구조 면에서는 우리나라 대형마트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서비스면에서 눈에 뜨였던 것이 있었는데, 물건 계산 후 봉지던 카트던 고객이 직접 계산한 물건을 담아 계산대를 빠져나오는 우리와 달리, 계산한 물건을 직원이 계산대 바로 옆에 위치한 테이블로 옮겨주고 거기서 고객이 물건을 담는 구조였다. 직원들 수고가 필요하긴 하지만, 뒤에 있는 고객 대기 정체를 줄여줄 수 있어 우리가 벤치마킹하면 괜찮겠다 싶었다. 

물건 구매 후 마트를 둘러보는데 입점 매장 중에 'Favori'라는 100엔 베이커리 체인점이 눈에 들어왔다. 생활용품을 100엔에 파는 건 많이 봤어도 베이커리류까지 100엔 체인이 있다니! 저성장 시대에 가성비를 중시하는 소비문화가 깊게 자리 잡혔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니즈를 맞출 수 있을 만큼 일본 기업들의 기초 체력 수준이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꽤 높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서는 지하철 역사 내 개인 베이커리를 제외하고는 동네 베이커리 프랜차이즈에서 1000원짜리 빵 보기가 거의 불가한데, 우리도 앞으로 저성장이 장기화되면 저가 F&B 프랜차이즈가 많이 생겨나지 않을까 싶었다.


호텔로 복귀해 마트에서 구매한 초밥에 맥주를 한잔 하며, 하루 종일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잠시 풀며 생각에 잠겨보았다. 호텔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드라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호텔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 내가 진짜 가고시마에 오긴 왔구나하는 생각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새벽부터 무거운 짐들을 끌고 인천에서 가고시마, 그리고 텐몬칸으로 이동, 호텔 도착 후 둘러봤던 데루쿠니 신사, 시로야마 전망대, 야뮤플라자, 이온 등 아침부터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꼽씹어 보았다. 말 그대로 긴 하루였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현지 생활의 시작이다. 새로운 모험에 대해 기대가 되면서도 계획했던 바를 이루기 위해선 일정을 촘촘히 잘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도 동시에 밀려왔다. 미세먼지가 없어서인지 가고시마의 밤하늘은 맑았다. 저 멀리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잘 해낼 수 있을 거다라고 스스로에게 화이팅을 한 번 불어넣은 후, 힘찬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하였다.

작가의 이전글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