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퇴근 후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친구를 만나 서로의 근황을 나누거나 싫어하는 직장 상사를 욕하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사람들이 많은 시간. 어쩌면 카페에서 가장 바쁘고 정신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 카페에서 일하는 혜선도 역시 눈과 손은 커피를 내리느라 바쁘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영 커피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까 윤경이와의 통화가 마음에 걸려서일까.
사무실에서 퇴근하고 또다른 직장인 카페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에 윤경이는 혜선에게 전화했다. 혜선은 평소와 같이, 언제나 그렇듯 자신과 놀아달라는 윤경이의 투정 정도일거라 생각하고 받은 전화였다. 그런데 혜선이의 귀에 닿은 것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윤경의 목소리였다.
"혜선아 나 남자친구와 헤어졌어."
어떻게 보면 서른이 넘은 나이에 남자랑 헤어진 게 뭐가 대수일까라는 생각이 들 것도 같지만 윤경이는 조금 달랐다. 대학시절부터 줄곧 한 남자만 바라본 연애. 그 남자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 것이라는 것에 티끝 하나의 의심도 없었던 아이. 그 아이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나 다름없었다.
"너 어디야? 엄한 데에서 술 퍼마실 생각하지말고 퇴근하고 바로 우리 카페로 와."
혜선이가 슬픈 마음에 무슨 짓이라도 할까봐 혜선은 조급한 목소리로 윤경에게 말했다. 몇번이나 다그친 후에야 윤경의 입에서 알았다는 대답이 나왔지만 그래도 혼자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추스리고 나오겠다는 윤경이의 고집까지는 꺽을 수 없어서 약속시간은 저녁 9시 정도로 잡았다. 혜선도 그정도 시간이면 카페에 양해를 구하고 한시간 정도 일찍 퇴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신없이 일하면서도 계속 벽시계를 바라보던 혜선은 아홉시가 다가오자 윤경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인 카라멜 마끼아토를 정성스럽게 내려 테이크 아웃잔에 담아 카페를 나섰다. 카페에서 꽤 오래 일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이렇게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려본 적은 없었는데......
카페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인 혜화역에서 윤경을 기다렸다.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팅팅 부은 얼굴을 한 윤경이 출구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혜선은 마음 같아서는 못난 녀석이라고 머리라도 한대 쥐어박고 싶기도 했지만 오늘은 윤경이 본인에게 가장 힘든 날일테니 꾹 참았다. 혜선을 본 윤경은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보였지만 혜선은 유난을 떠는 대신 조용히 혜선의 어깨를 두들겨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 나 조용한 데에서 이야기 하고 싶어."
윤경이 혜선에게 칭얼거리듯이 말했다. 평소라면 들은 체도 안했을 어리광이었지만 이 날은 혜선도 심상치 않은 날이라고 느꼈던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짧게 대답했다.
"그럼 낙산공원으로 가자. 사람들도 북적이는 카페나 술집 보다야 거기가 낫겠지?"
혜선의 말에 윤경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둘이서 조용히 낙산공원으로 향했다. 낙산공원. 외국인들에게는 관광지. 연인들에게는 좋은 데이트 코스이겠지만 혜선과 윤경에게는 세상살이에 지친 답답한 속을 달래는 해방구 같은 곳이었다. 어떤 계절이든 너무 춥거나 덥지만 않는다면 낙산공원의 한적한 벤치에 앉아 서로의 속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고는 했다. 주로 혜선은 듣는 쪽에 가까웠지만. 이때만큼은 단둘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고등학생 때로 돌아 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체육시간에 몸을 움직이기 싫어 체육선생님을 피해 운동장 한켠의 벤치에서 수다를 떨던 그때 그시절처럼. 늦가을에 접어든 날씨였기에 제법 쌀쌀했지만 그래도 둘에게는 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적당한 벤치에 찾아 둘은 자리를 잡았다. 벤치에 앉은 후에도 윤경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윤경이가 카라멜 마끼아또 몇모금을 마시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었다. 얼마간의 정적이 지난 후 어렵게 윤경이가 입을 열었다.
"혜선아. 나 오늘 현식이랑 헤어졌어. 거의 10년 가까이 만났는데, 우리 둘은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끝나버렸어..."
"둘 사이에 큰 문제는 없었잖아? 혹시 내가 모르는 이유라도 있는거야?"
혜선은 윤경이가 남자친구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거나 불평을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보통 헤어지기 전에는 상대에 대한 불평 같은 것들을 주변인에게 무의식 중에라도 하기 마련이지만 윤경이에게는 그런 징후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또 남자친구에 대한 마음이 워낙 확고했었기에 그 둘이 헤어질 것이라는 것을 혜선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혜선의 물음에 대해 윤경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현식이는 대학시절부터 만나왔으니까 서로 대해서 조건이나 환경 같은 것을 보지 않고 오로지 서로만을 바라보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어. 처음 몇년간은 참 행복했어. 서로가 서로 같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지. 처음엔 강렬한 사랑이었지만 몇년 지나니 가족 같은 애정도 함께 생겨났어. 서로의 삶에 서로가 깊게 자리하게 된거지. 서로의 진로나 인간관계에도 조언도 해주고 하다 못해 작은 물건 하나 사는 것도 서로에게 의논했어. 그토록 가까운 사이였어. 우리가."
"하긴 옆에서 봤을 때 너희는 연인 보다는 부부에 가깝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말야..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서로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것 같아. 아마 내가 취업을 먼저 하고 현식이가 취업을 하지 못한 순간부터였을지도 몰라. 처음 내가 합격했다고 했을 때 현식이는 우리 부모님 보다도 더 좋아했어. 내가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었는지 다 알았으니까. 자기가 취업한 것처럼 좋아했다니까. 그랬던 현식이가 시간이 가면서 많이 조급해하더라. 처음에 현식이가 시험에 떨어졌을 때는 현식이도 담담해했어. 한번에 붙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현식이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두번째도 떨어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현식이 부모님 형편까지 어려워지자 현식이도 점점 힘들어하더라. "
"그렇게 힘들면 다른 일을 찾아볼 수도 있잖아? 굳이 계속 공부를 해야 돼? 너도 이제 나이도 먹고 결혼도 해야되는데 언제까지 남자친구를 기다릴 수도 없잖아."
" 바로 그게 현식이를 더 힘들게 한 것 같아. 사실 나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어. 직장에서 힘든 일을 남자친구한테라도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직 취업도 하지 못한 현식이에게 말해봤자 복에 겨운 소리만 될 것 같았고. 또 직장에서 언제 결혼하냐는 말이 나올 때마다 어색한 웃음으로 대처하는 것도 고역이었으니까. 근데 나는 그저 우리에게 잠시 힘든 시기이구나. 이 시기만 잘 넘기면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겠지. 이런 생각들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현식이 생각은 조금 달랐나봐. 시간이 갈수록 나란 존재가 부담이었대. 나를 기다리게 하는 자신이 너무 못나보였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미안함이었지만 점점 부담감으로 자리잡았대. 이제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 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거의 10년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우린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건 그저 내 착각이었나봐."
힘들게 자신의 속 이야기를 마치고 윤경은 펑펑 울었다. 마치 그동안 차곡 차곡 몸에 담아둔 아픔들이 한 순간에 폭발한 것처럼 세상이 떠나갈 것 같이 울었다. 그런 윤경이를 보고 혜선은 아무 말도 더 할 수 없었다. 아니 더하고 싶지 않았다. 연애 경험도 별로 없는 어줍잖은 자신의 몇마디 말로 10년의 세월을 송두리채 잃어버린 윤경이를 어설프게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윤경이의 등을 두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윤경이의 등을 두드리며 혜선은 생각했다. 윤경이와 그 남자친구는 서로 기댈 수 있는 사이였구나. 그리고 서로에게 기대며 행복했었지만 서로 너무 힘든 나머지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다가 무너지는 사이였구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