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에게도 어둠은 있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자작나무 숲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의 소리에 맞춰서 자작 나뭇가지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지만 그 춤은 밝고 신나는 왈츠 같은 춤이 아니라 한이 담긴, 어딘가 쓸쓸한 춤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에스파나 남부 세비야에서 한 많은 집시가 추는 플라멩코 같다고나 할까. 플라멩코의 춤사위가 빠르고 화려하지만 그 춤의 기저에는 왠지 모를 슬픔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자작나무들의 흔들리는 나뭇가지들도 빠르게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 안에는 여름의 번성함이 시들어감에 대한 슬픔이 담겨있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자작나무의 움직임을 보는 앤의 마음 안에 어둠이 담겨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참 긴 세월들이었다. 그리고 힘겨운 시간들이기도 했다. 앤의 인생이라는 것은.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까지 앤의 삶에는 따뜻한 햇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앤은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때부터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그랬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집이나 아는 아주머니 집 등을 전전하던 그녀를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상처였다. 물론 철이 든 지금에서야 그녀를 맡았던 집들에서도 자식들이 있었고 먹고 살기 퍽퍽한 것은 매한가지였을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를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랬다. 그때 앤은 어렸고 사랑이 고팠다. 처음에는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집안일을 거들기도 하고 그 집 아이를 보기도 하며 자신이 그 집에 도움이 되는 존재이며 불편하고 부담스럽기만 한 객식구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치열한 몸부림에도 앤은 그저 객식구일 뿐이었다. 가족에서 겉도는 존재. 나중에는 맡아주는 가정마저 없어 고아원에 갔을 때에도 앤의 이러한 몸부림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아원에는 너무 많은 아이들이 있기에 고아원 원장님에게 이름 하나라도 더 불리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까. 어떤 집에서 집안일을 거들 여자아이가 필요하다는 전보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앤은 그 행운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기 위해서 더 밝고 더 과장된 목소리로 끊임없이 원장님에게 재잘댔다. 자신은 밝고 건강한 아이이다. 그리고 집안일도 잘하는 '쓸모 있는 존재'라고. 마침내 그 행운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었을 때 앤은 이제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뻤다. 기차역에서 한참 동안 기다릴 때에도 앤은 지루하지 않았다. 자신을 데려올 그분들을 상상하면서 앞으로 사랑받을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매튜 아저씨를 본 순간,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온 이 행운에 도취되어 신나 있었다. 그의 마차를 타며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은 갑자기 크게 변하는 법은 없나 보다. 매튜 아저씨의 집에 도착해서 아저씨의 동생인 마릴라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 앤은 절망에 빠졌다. 매튜 아저씨 집이 원한 것은 '집안일을 도울 여자아이'가 아니라 '밭일을 도울 남자아이'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이 하늘의 천사들이 그녀에게 준 선물이 아니라 단순한 인간들의 착오였다는 것을 알아버린 앤은 왜 세상은 나에게 이토록 가혹한가에 절망했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초록 지붕 집의 모습을 보고 그 안에서 사랑받는 자신을 한껏 상상한 후였기에 절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녀가 매튜 아저씨의 마음에 든 덕분에 마릴라 아줌마의 반대에도 그녀는 초록 지붕 집에 남을 수 있었다. 마릴라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반대하셨지만 시간이 흐르자 앤을 진심으로 아껴주셨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사랑. 그 사랑에 앤은 흠뻑 빠져버렸다. 처음에는 더 많은 사랑을 받고자 더 밝게, 끊임없이 이야기해 두 분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그것이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랑받는 법'이었으므로. 그리고 때로는 간혹 이어지는 대화의 공백이 두려워 더 수다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누군가와 말을 계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 마음속에서 나란 존재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릴라 아주머니의 변함없는 사랑과 훈육 덕분에 마음의 공허함이 사라지고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점차 줄어들면서 앤의 공허한 수다스러움은 다소 누그러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 있었다. 두 분들에게 자랑스러운, 도움이 되는 딸이 되는 것. 공허한 재잘거림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두 분에게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택한 방법이 공부였다. 처음에는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여러 가정들을 전전하면서 공부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틴어라던가, 작문이라던가, 수학이라는 등의 학문은 그녀에게는 너무 생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분명한 목표 의식이 있었기에 이러한 장애물들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공부라는 것은 불확실한 사람의 마음과는 달리 앤이 애정을 주고 노력을 기울이면 확실하게 성과가 나오는, 그녀를 배신하지 않는 것들이었기에 더 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동안 사람의 애정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던 시절은 공허하기 짝이 없던 시간들이었지만 남의 관심이 아닌 자신의 성취에 더 무게감을 두면서 앤의 공허한 시간도 끝이 나는 듯했다.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의 사랑과 안정된 생활환경 속에서 앤은 지성과 인성을 갖춘 어엿한 숙녀로 자라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무뚝뚝하기만 했던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보이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제 앤은 그들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만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소중한 존재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따뜻하고 행복한 날들은 길지 않듯이 앤의 행복한 시절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따뜻했던 매튜 아저씨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매튜 아저씨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기에 아늑했던 초록 지붕 집은 그의 부재로 인해서 슬픔이 내려앉게 되었다. 앤의 마음속에서도 그동안 가슴 깊숙이 숨겨두었던 어둠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이 집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아니 어렸을 때 보다 지금이 더 불안했다. 지금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인 마릴라 아주머니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앤은 더군다나 곧 성인이 되어 타지의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남은 마릴라 아주머니가 매튜 아저씨에 이어 자신마저 떠나보내면 그 상황을 잘 버텨내실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앤의 어둠이 점점 커질 무렵 뜻밖의 소식이 앤을 찾아왔다. 앤이 살고 있는 지역과 가까운 대학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원래 그 대학은 다른 학생이 가기로 되어있었으나 그 학생이 포기하면서 갑작스레 자리가 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앤에게 그 대학을 양보한 학생의 이름이었다. 바로 길버트였다. 길버트. 어렸을 적 앤을 진절머리 나게 괴롭혔던 남학생이었다. 장난이 항상 지나쳐서 앤에게 자주 상처를 줬던 그 길버트였다. 사춘기 시절에 들어서면서 그의 장난은 줄어들었고 점차 앤과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게 되는 사이가 된 지라 선생님께 그의 이름을 듣게 된 순간 앤은 처음에는 어떤 착오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분명 몇 번을 확인해도 그 이름이었다.
집에 돌아온 후 혼란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고자 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자작나무 숲의 향기를 맡으며, 발끝에서 느껴지는 풀들의 감촉을 느끼며 앤은 조금씩 마음을 진정시켜갔다. 그리고 자신이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의 삶에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를 떠올렸다. 길버트였다. 대학을 양보한 이후 길버트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너를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노라고.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행동들조차 모두 너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처음에는 너무 미안해서 말을 걸지 못했고 나중에는 심장이 너무 떨려서 자신도 모르게 두 볼이 상기되어서 마음이 들킬까 말을 걸지 못했다고. 앤은 길버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이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의 장난기 어린 눈매는 남아있었지만 개구쟁이 소년은 어느새 선 굵은 남자가 되어있었다. 당황한 앤이 말을 잇지 못하자 길버트는 다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자신이 너에게 대학을 양보하였다고 해서 나를 사랑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앤에게 대학을 양보한 이유를 궁금해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앤은 결국 길버트를 사랑하게 되었다. 단순히 대학을 양보해준 고마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앤의 인생은 줄곧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온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존재에게 사랑받게 되니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점점 꾸미지 않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준 길버트란 남자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길버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그와 연인이 된 순간부터 앤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 동안 자리 잡은 어둠이 눈 녹듯이 녹아내림을 느꼈다. 아!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이구나. 그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이구나. 사랑받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