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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죽의 가고시마 여행 4-1

왜 사쓰마인가

by 넙죽

왜 사쓰마인가


근래에 꽤나 '핫'한 여행지로 여겨지는 가고시마 현을 여행하기로 마음 먹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작년에 북규슈 지방을 여행했으니 올해는 남규슈 지방을 여행해보자라는 취지였다. 남규슈의 적당한 도시들을 물색하던 중 내 눈에 들어온 곳이 가고시마 현이었다. 가고시마. 남규슈에 위치한 이 작은 도시는 과거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하나였던 도시였다. 가고시마 현의 옛 지명은 사쓰마 번인데 현재의 야마구치 현인 조슈 번과 삿쵸동맹을 이루어 당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만들어 낸 유명한 지역이다. 대학시절 전공과목인 일본의 정치 경제 수업을 들으면서 당시 사쓰마 번의 위치가 일본 본토인 혼슈가 아닌 남큐슈에 위치해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었던 기억이 있다. 일본 역사를 통틀어 항상 중요한 사건들은 일본 혼슈에서 이루어져 왔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변방인 이 작은 번이 어떻게 메이지 유신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가고시마 현으로 향했다.

20181125_112243.jpg 가고시마는 큐슈 남부에 위치한 작은 항구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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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열려진 작은 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에도 막부를 세운 후 일본은 오랫동안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쇄국정책을 꾀해왔다. 정국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고 그 정책은 상당히 오랜 기간 효과를 발휘해왔다. 아마도 특정 번의 영주들이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쌓아 군대를 기르고 자신들의 막부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쇄국정책도 에도. 그러니까 지금의 도쿄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큐슈 지역에서는 크게 영향을 발휘하지는 못했나 보다. 남큐슈에 위차한 사쓰마(가고시마)는 일본에게 있어서 세상으로 열려진 작은 문 같은 것이었다. 사쓰마는 당시 남방무역이라고 불리는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교역으로 번성했다. 당시 동남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동남아 자체의 산물 뿐만 아니라 저 먼 아메리카 대륙의 물산까지도 들어날랐다. 그러나 교역이 어찌 물자만 나른다던가. 수많은 물산들이 오갈 때, 수많은 사람들도 오고 갔다. 그리고 그 와중에 서구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도 전파되었다. 가톨릭의 예수회 소속 선교사로 유명한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일본 열도의 수많은 곳에서도 굳이 사쓰마 번에 처음 상륙한 것도 당시 사쓰마가 꽤나 번성한 항구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물산, 사람, 생각들이 오고가던 중 사쓰마 사람들은 세계가 앞으로 크게 변화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달은 데에 그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까지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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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가문의 결단


당시 사쓰마 현을 포함하여 남규슈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가문은 시마즈 가문이었다. 시마즈 가문은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 가문과의 연이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번성해온, 이른바 전통있는 가문이었다. 이러한 가문의 역사를 보면 굉장히 보수적인 가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시마즈 가문은 꽤나 진보적이었나 보다.

20181125_151413.jpg 시마즈 가문의 별장인 센간엔

가고시마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시마즈 가문의 별장인 센간엔이 있다. 센간엔에 들어가면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을 느낄 수 있는데 내가 주목한 것은 정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마즈 가문의 개방성이었다. 약간의 입장료를 더 내면 시마즈 가문의 별장 건물 내부로 들어가 볼 수 있다. 그 별장은 여느 일본 가옥처럼 바닥에 다다미가 깔려있지만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서양의 가구들이었다. 특히 외국의 인사들이 오면 맞이하는 응접실 같은 공간은 서양식 식탁과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고 외국의 인사도 오면 만나겠다는 개방성이 느껴진다. 번성한 항구도시의 영주 다운 열린 자세이다.

20181125_154421.jpg 시마즈 가문의 응접실
20181125_154909.jpg 센간엔 내부에는 이렇게 서양식 가구들이 채워져 있었다

또한 시마즈 가문은 외국의 문물을 보고 듣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센간엔은 시마즈 가문의 개인 공간이었으나 그들은 이 곳에 철을 녹이는 반사로라는 것을 만들고 별장 가까운 곳에 슈세이칸이라는 근대식 공장까지 지어 서양의 기술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려는 시도들을 한다. 또한 외국의 방적 기술자들을 사쓰마 번에 정착시켜 살게하면서 그들의 기술을 완벽히 흡수하려고도 했다. 슈세이칸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이진칸. 우리 말로 외국인들이 사는 집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이 이진칸은 그 지역의 자재로 최대한 외국인들의 취향에 맞는 건물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보인다.

20181125_160611.jpg 별장 내에는 이렇게 반사로가 만들어져 있다
20181125_161725(0).jpg 일본 근대화의 중요 공간인 근대식 공장 슈세이칸
20181126_105329.jpg 서양인 기술자들이 머물던 공간인 이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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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6_105741.jpg 이진칸의 기술자들은 사쓰마 번에게 서양의 방적기술을 가르쳤다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을까. 메이지 유신 이후 수많은 영주 가문들이 그들의 영지를 빼앗기고 몰락해갈 때 시마즈 가문은 일본의 천황인 덴노로부터 공작에 봉해지고 사쓰마 지역의 지사가 되어 상당히 오랫동안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된다. 변화에 민감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무엇이든 배워야 산다


사쓰마 번의 번영은 시마즈 가문의 덕분만은 아니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나가보면 젊은 사쓰마의 군상이라는 동상들이 있다. 군상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생각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동상이 가득하다. 도시의 중앙역에는 보통 그 도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조형물들이 있기 마련이라 이 동상의 주인공들이 궁금해졌다. 알아보니 이 동상의 주인공들은 바로 사쓰마 번의 젊은 유학생들이었다. 사쓰마 번의 젊은 이들은 당시 유럽의 국가들을 근대화의 롤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유럽으로 유학을 많이 떠났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의 초강대국으로 손꼽히던 영국에 유학을 많이 갔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이야 교통도 많이 발달했고 해외여행도 보편화 된 시기에 살고 있지만 당시에 유럽에 간다는 것은 배로도 몇십일이 걸리고 수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많은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배우겠다는 일념하에 수많은 사쓰마의 청년들은 유럽으로, 영국으로 떠난 것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 동상의 주인공들 중에서 매우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 앞에서 나이는 작은 장애물에 불과한가 보다. 유럽으로 배우러 떠났던 청년들은 고향 사쓰마로 돌아와 개혁을 부르짖었고 이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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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_133210.jpg 가고시마 중앙역 앞에 위치한 '젊은 사쓰마의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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