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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죽의 가고시마 여행 4-2

엇갈린 동지들의 운명

by 넙죽

사쓰마 출신의 거목들


메이지 유신을 이야기 할 때 꼭 빠지지 않는 세 인물이 있다. 이 세 인물들을 유신 삼걸이라고 부른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이 바로 그들인데 기도 다카요시만이 현재의 야마구치 현인 조슈 번 출신이고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현재 가고시마 현인 사쓰마 번 출신이다. 유신 삼걸 중에서도 사쓰마 번 출신이 두명이나 나왔기 때문에 가고시마 사람들이 매우 자랑스러워할 만도 하다. 그러나 분명 유명한 인물은 두명인데 사이고 다카모리 쪽이 훨씬 더 인기가 있다. 가고시마를 둘어봐도 사이고 다카모리를 형상화한 캐릭터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오오쿠보 도시미치 쪽은 찾아보기 참 어렵다. 왜 가고시마 인들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더 좋아하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나는 그들의 흔적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20181125_133502.jpg 가고시마 곳곳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캐릭터를 찾아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둘 다 시마즈 가문을 위해서 일하던 하급 무사 출신이었다. 나름 행세하던 중산층 정도로 보면 되겠으나 그다지 신분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당시에는 개인의 능력보다 출신을 보던 시대였으니 평소라면 높은 자리에 등용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시마즈 가문은 매우 깨어있는 가문이었고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그 가문 보다는 그들의 능력을 보았다. 때문에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시마즈 가문에게 쓰임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사쓰마 번의 근대화와 막부 타도 등을 추진하면서 이 둘은 꽤나 뛰어난 성과들을 보이게 된다. 둘 다 뛰어난 인물들이기는 하나 각자의 특기들은 달랐던 모양이다. 당시 일본 평균보다 큰 키와 골격을 가진 사이고 다카모리 쪽은 장군형에 가까웠지만 오오쿠보 도시미치 쪽은 야전에서 싸우는 장군 보다는 행정관료형에 가까웠다고 한다. 실제로 메이지 유신 성공 후 내각을 구성하면서 이들의 자리도 이들의 성향에 맞게 선택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육군 대장에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내무장관 격인 내국경이 되었다. 사쓰마라는 변방에서 일본 권력의 중심으로 그 둘은 같이 성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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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둘의 운명


이 둘의 운명이 갈라지게 된 것은 '정한론'에 대한 의견 차이였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후 급속한 근대화로 인하여 기존의 기득권 층이었던 무사 계급의 불만이 빠르게 고조되고 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유신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 무사 계급의 관심을 돌릴 곳이 필요하다고 보고 조선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그 옛날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말이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이러한 주장에 당시 내각을 주도하고 있던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이 의견에 반대했다.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낙심하고 고향인 사쓰마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이름은 꽤나 무게감이 있었나 보다. 그의 밑으로 젊은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메이지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들을 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들을 이끌고 도쿄로 진격하게 되나 곧 큐슈 중간 지점 그러니까 현재의 구마모토 지역에서 오오쿠보 도시미치가 보낸 정부군과 맞닥드리게 된다. 이 전쟁이 바로 그 유명한 서남(세이난)전쟁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군에 패배하게 되고 고향의 뒷산인 시로야마의 한 동굴로 피신하게 된다. 이 동굴에 피신해 있는 동안 사이고 다카모리는 꽤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결단이 선 후 그 실행은 매우 빨랐다. 패배를 인정하고 자결은 한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사내의 결말답다고 할 만 했다.

20181126_094417.jpg 가고시마에 위치한 시로야마는 아직도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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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6_102504.jpg 시로야마의 작은 동굴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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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세이난) 전쟁 그 이후


서남 전쟁에서 승리한 오오쿠보 도시미치 앞에는 더 이상 걸릴 것이 없어보였다. 동지이긴 했으나 라이벌이기도 했던 사이고 다카모리도 없어졌고 내각까지 장악했던 그였기에 더이상 일본에서 그보다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을 없었다. 그러나 그도 그 권력을 오랫동안 누리지는 못했다. 너무 급격한 근대화의 저항이었을까.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서남전쟁이 끝나고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도쿄 한가운데에서 정적들에게 암살된다.

오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된 후 사쓰마 번의 유신지사들은 급속도로 힘이 약하되기 시작했고 일본 내각은 조슈 번의 이토 히로부미가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일본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 지는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조슈 번에 조금 밀리긴 했어도 사쓰마 번의 세력은 꽤나 남아있어 해군 쪽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오쿠보 도시미치 이후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러일 전쟁의 승리자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의 군부세력이 몰락했어도 아직까지 일본 정계에서 사쓰마와 조슈 출신의 정치인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들의 핏줄 아니면 정치적 후계자들이 일본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꽤나 많은 총리들이 가고시마나 야마구치 현에서 배출되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그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181126_120354.jpg 오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
20181126_120414.jpg 군인복장의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달리 정장 차림이다


그래서 왜 사이고 다카모리를 더 좋아하는가


왜 가고시마 사람들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더 좋아하는 지에 대하여 여행 말미 쯤 스스로 답을 내렸었다. 그가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영웅이기 때문이라고. 사람은 묘하게 해피엔딩 보다도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굵직한 인물의 삶에 더 매료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실제로 가고시마 사람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생각지도 못한 답이 나왔다. 가고시마의 한 선술집에서 그 집 젋은 주인에게 물었었다. 왜 가고시마 사람들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더 좋아하나요? 라고. 그는 대답했다.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고향을 버리고 도쿄로 떠났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 사람들과 같이 싸우다 죽었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더 사이고 다카모리를 좋아한다고 말이다. 사이고 상(사이고 선생)정도가 아니라 사이고 돈(사이고 두목)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이니 가고시마 사람들의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사랑은 쉽게 식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여담으로 그 선술집에서 술 한잔 하면서 주인과 몇마디 이야기를 더 했는데 나보고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금 닮아단다. 그의 입장에서는 고향의 자랑스러운 영웅을 닮았다고 한껏 치켜세운 모양이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장하기도 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마시고 있던 소주의 맛이 순간 더 쓰게 느껴졌다.

20181125_175308.jpg 가고시마의 유명한 선술집 골목인 야타이 무라. 포장마차 촌이라는 뜻이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거구인 이유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포함하여 사쓰바 번 출신의 남자들은 일본 다른 지역의 남자들보다 키도 크고 골격도 장대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가장 신빙성 있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다. 보통 일본의 다른 지역들은 오랫동안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류를 많이 섭취하지 않았는데 이 곳 사쓰마는 지금의 오키나와, 당시 류큐왕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그 곳의 영향을 받아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고기를 즐겨 먹었기 때문이란다. 사이고 다카모리만 해도 18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이었다니까 현대의 사람들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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