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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들의 도시, 산 지미냐노

피렌체 근교 도시

by 넙죽


탑들의 도시, 산 지미냐노


피렌체도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다른 느낌의 도시도 가보고 싶었다. 보통 피렌체 근교 지역을 토스카나라고 하는데 이 토스카나 지역은 숲과 농지로 가득 찬 전원 풍경으로 유명하다. 이 전원 풍경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근교의 소도시로 가야 하는데 나에게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확 사로잡는 도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산 지미냐노'다.


투스카니의_풍경.jpg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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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는 과거에는 로마로 성지순례를 오는 순례객들이 잠시 경유하는 도시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도시의 탑들도 더 유명했다. 보통 탑이란 것은 도시의 성당이나 시청, 성곽 등에 사용되며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리거나 적들의 침입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곳 산 지미냐노의 탑의 용도는 조금 다르다. 산 지미냐노에 수많은 탑들이 세워진 이유는 이 도시의 주요 산업인 염색업과 관련이 깊다. 보통 염색하기 위해서는 가죽이나 섬유 등을 염료에 담근 후 건조하는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건조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풍부한 일조량이다. 다시 말해, 산 지미냐노의 수많은 탑들은 바로 도시의 염색업자들이 태양을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세운 탑이란 것이다. 한 때 72개에 달했다던 도시의 탑들은 현재 얼마 남아있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다른 소도시들과는 다른 특색 있는 매력을 뽐내기에는 충분한 수가 남아있었다.


지미냐노_이름.jpg 산 지미냐노로 향하는 비밀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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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_광장.jpg 산 지미냐노의 시청사, 전망대가 있는 토레 데 그로싸 탑, 산타마리아 아순타 성당이 있는 중앙 광장
아순타.jpg 산타 마리아 아순타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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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쓰.jpg 토레 그로싸에서 바라본 풍경


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조용하고 한적했다. 사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많이 아쉬웠던 점은 로마나 피렌체 등 여러 도시들이 지나치게 관광화되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방문하고자 하는 마음은 다른 관광객들도 마찬가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들에서는 이탈리아다운 맛은 찾아볼 수 있다. 도시의 사람들도 소박하고 친절하다. 이번 여행은 워낙 일정이 짧은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소도시는 산 지미냐노 밖에 방문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도시를 방문한 덕에 잠시나마 여행의 쉼표를 찍을 수 있었다. 때로는 대단한 관광지가 아닌 한적한 골목길과 거리를 걷고 작은 상점들을 여유롭게 엿보는 일이 진정한 여행이 될 수도 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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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지미냐노를 향하는 험난한 길


산 지미냐노는 분명 매력적인 도시이지만 개인 여행자가 피렌체에서 산 지미냐노로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피렌체의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포지본시라는 이름도 낯선 도시에서 한참을 기다린 후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장장 편도 2시간의 대장정이다. 당일 치기로의 여정으로는 조금 벅찬 감이 있었다.


산 지미냐노로 향하는 길에서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과연 이탈리아어를 '본 조르노(안녕하세요)' '그라찌에(감사합니다)''피에르 파보레(부탁해요)' 정도만 아는 내가 교통편도 좋지 않은 이 도시를 무사히 다녀올 수 있느냐였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갔겠지만 아내와 함께 가는 길이니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나의 걱정은 불행히도 빗나가지 않았는데 우선 피렌체에서 버스는 잘 탔으나 문제가 발생한 시점은 버스에서 내릴 때였다. 원래 생각했던 환승지점이 아닌 전혀 동떨어진 곳에서 내려버린 것이다. 워낙 낯선 시골 풍경이었는 데다가 평소에는 나를 올바른 곳으로 잘 이끌던 구글 지도도 그날따라 잘 작동하지 않았다.


그럴 때는 여행자의 직감을 믿을 수밖에 없는데 보통 관광지에서는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정류장에서 내리면 그래도 7할 정도는 맞으니 그 경험을 믿어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나의 판단은 오판이었고 이름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주변에는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한참을 걸어 그래도 사람들이 다닐 만한 작은 동네에 닿을 수 있었다. 어찌어찌 손짓 발짓과 '산 지미냐노'라는 단어를 연발한 끝에 비로소 산 지미냐노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또 한참을 애타게 버스를 기다린 덕에 비로소 산 지미냐노를 만날 수 있었다. 사실 버스에서 내릴 때에도 긴가민가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만난 수많은 탑들의 모습이 내가 제대로 이곳에 도착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한참을 산 지미냐노를 구경한 뒤 또다시 2시간이 넘는 이동을 거쳐 아내와 함께 피렌체에 있는 우리의 숙소로 도착했다. 이날 참으로 고생했지만 그래도 꽤나 볼만한 도시였다는 이야기를 하며 나는 아내에게 어리바리한 남편을 믿고 잘 따라와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남편의 판단 착오로 많은 고생을 해 짜증이 날 만도 한데 아내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살면서 있을 수 있는 해프닝이라고 넘길 뿐이었다.


나는 사실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난관을 만나면 당황해하고 심하게 긴장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도 매우 크다. 그러나 아내를 만나고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어지간한 문제는 흘려 넘기는 일이 많아졌다. 마음이 편해졌다. 직장에서 화가 나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아내에게 털어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사람마다 결혼을 통하여 얻거나 잃는 것이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이것만으로도 결혼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정이 그다지 고되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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