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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르코 광장 산책

베네치아 여행의 시작이자 끝

by 넙죽

베네치아의 모든 것이 산 마르코 광장에 있을 것이다


베네치아의 도시 중심은 누가 뭐라 해도 산 마르코 광장일 것이다. 베네치아를 찾는 모든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며 베네치아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시설들이 밀집해있는 곳이다. 우선 광장 자체만 해도 수많은 열주들이 광장을 휘감듯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찾아 여행을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산 마르코 광장과 그 주위를 산책하면서 베네치아의 이야기를 찾아다닐 생각이다.


마르코_광장_뷰.jpg 베네치아 중심인 산 마르코 광장 그 덕분인지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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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라쓰.jpg 산마르코 광장 앞의 곤돌라들
마르코광장.jpg


베네치아가 황금사자의 도시가 된 이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베네치아 영화제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제의 최고상을 황금사자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바로 황금사자가 베네치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왜 황금사자가 베네치아의 상징이 되었는가에 대해 파고들어가 보아야겠다.


황금_사자.jpg 산 마르코 성당에 장식되어 있는 황금사자
도시의 두 상징.jpg 왼쪽 기둥에는 마르코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 오른쪽 기둥에는 아마세아의 성 테오도로의 상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수호성인 산 마르코를 상징하는 동물이 바로 날개 달린 사자이기 때문이다. 산 마르코라고 하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말로 된 성경에서 '마가'라고 불리는, 마가복음의 저자인 바로 그분이다. 성인 마가의 이탈리아어명이 '마르코'이고 '산'은 이탈리아어로 성스롭다는 의미이니 '성스러운 마가'님 정도 되시겠다. 여담이지만 나의 세례명도 마르코이다. 사실 4대 복음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마르코 보다는 여행자인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착안하여 선택한 이름이지만 말이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4대 복음서의 각 저자들을 큰 성인으로 여기며 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유명한 대성당이나 예배당에 가면 이들을 상징하는 표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대 복음서의 저자들과 그들을 상징하는 표지들은 아래와 같다.


1. 마태오(마태복음의 저자) : 사람
2. 마르코(마가복음의 저자) : 날개 달린 사자
3. 루카(누가복음의 저자) : 날개 달린 황소
4. 요한(요한복음의 저자) : 독수리


마태오.jpg 마태오
마가.jpg 마르코
루카.jpg 루카
요한쓰.jpg 요한

다시 말해, 사자가 바로 성인 마르코의 상징이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사자의 도시가 된 것이다. 성 마르코가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 된 이유도 상당히 재미있는데 원래 성 마르코의 유해는 지금의 이집트 지역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를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기 시작하자 당시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슬람 세력들에 의해 시신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고 성인의 시신을 베네치아로 모실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감시의 눈을 피하고 운반 과정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 성인의 유해 위에 이슬람교도들이 꺼려하는 돼지고기들을 올려놓았는데 그 덕분인지 무사히 베네치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베네치아에 도착한 성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베네치아 인들은 산 마르코 성당을 지었고 그 안에 성인의 유해를 모셨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이때부터 성 마르코를 그들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상층_상층.jpg 산마르코 성당
산마르코 베리굿.jpg


서양의 역사를 읽으면 중세나 르네상스의 서양인들이 수호성인에 대해 중시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나는 이것을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전환되는 과도기 단계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로마시대까지만 해도 서양은 오랜 시간 다신교의 세계에 있었다. 로마제국 시절, 일신교인 기독교가 공인되었다고는 하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한 번에 변하기란 쉽지가 않다. 마음의 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여러 세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인간이란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며 자신을 지켜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 다신교 세계에서는 헤르메스나 아폴론 등 자신의 직업이나 가치관에 따른 신을 골라서 믿을 수 있었지만 일신교인 기독교 세계관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파문을 받기 딱 좋았다. 그래서 다름대로 타협점을 찾은 것이 수호성인이었던 것이다. 수호성인은 성스럽고 초월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신은 아니었다. 또한 원래는 인간이었다가 숭고한 행위나 죽음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자인 신보다는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베네치아 인들은 성 마르코를 그들의 수호성인으로 삼은 후 정말 성인의 가호라도 받은 듯 더욱더 그들의 세력을 뻗어나가 동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도제가 베네치아를 부흥으로 이끌 것이니!


베네치아의 국가원수를 '도제'라고 부른다. 이 도제는 선출직인 동시에 종신직이었으나 특정 가문에 의한 세습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베네치아에서는 피렌체를 포함한 다른 도시국가들과는 다르게 특정 가문에 의한 권력 독점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피렌체 하면 메디치 가문이 떠오르는 것처럼 베네치아를 떠올리면 특정 가문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들 도제들은 베네치아라는 큰 배를 지휘하는 선장이었으며 베네치아의 시민들은 도제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베네치아의 생존과 번영이었으며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도제들 또한 이러한 시민들에게 응답하듯 베네치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이 항상 도덕적으로 올바른 방향이 아닐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듀칼레레.jpg 도제의 궁전인 듀칼레 궁전

당시 기독교 세계관이 유럽을 지배할 때에도 베네치아에서 만큼은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는데, 베네치아 인들에게 있어 종교보다는 생존과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베네치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제의 집무실인 두칼레 궁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산 마르코 성당 자체도 교황의 힘이 미치는 주교좌성당이 아니라 도제의 개인 예배당이었다. 어쩌면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당시부터 베네치아 인들은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베네치아 인들은 그 어떤 신념보다도 도제의 리더십을 우선적으로 따랐는데 이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4차 십자군'이었다.


'4차 십자군'의 발단은 그랬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동안의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교황도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을 각국의 왕들과 영주들에게 촉구했다. 그러나 4차라는 숫자가 말해주듯 이미 수차례의 십자군이 있었고 또한 실패했기 때문에 각국의 왕들은 흥미를 이미 잃었고 4차 십자군에 응한 것은 아직까지 기사도란 것이 남아있는 프랑스의 영주들과 기사들 정도였다. 당시 성지 예루살렘으로 병력의 손실 없이 닿기 위해서는 역시 바닷길이 최고였기 때문에 이들의 운송은 당시 지중해의 최고 해운국인 베네치아가 담당하기로 했다. 물론, 뱃삯은 받고서.


그러나 문제는 예상보다 적은 십자군이 모인 나머지 이들 십자군들이 베네치아에게 약속한 운송대금을 지불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때 베네치아의 도제였던 엔리코 단돌로는 이들에게 제안을 하나 하게 되는데 예루살렘을 가는 길목에 있는 '자라'라는 도시 하나를 점령해달라는 것이다. 베네치아가 동이탈리아에 있는 바다인 아드리아 해를 장악하기 위한 교두보로 쓰기 위함이었는데, 중요한 사실은 이 '자라'라는 도시를 점령하고 있던 것이 같은 기독교 세력이었던 헝가리 왕국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는 십자군에게 별 수가 없었고 이들은 베네치아에 협력하게 된다.


콰드리가.jpg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것으로 전해지는 4개의 청동 말인 콰드리가(현재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항상 모든 나쁜 일이 그렇듯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처음에는 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 '자라'로 시작된 4차 십자군의 일탈이 이제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동로마제국이 뜬금없이 이들의 목표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오래전부터 동로마제국인 베네치아가 동지중해에서 그 세력을 넓히는데 방해물이었고 그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엄청난 부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신앙심으로 시작했던 십자군은 동로마제국의 엄청난 부로 그 목표가 바뀌어버렸고, 그들의 화살은 성지를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아닌 같은 기독교인들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로 향해졌다. 콘스탄티노플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졌고 베네치아 인들은 십자군의 힘을 빌어 그들의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었다. 과연 베네치아 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죄책감이 들었을까. 내 생각에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가 조국의 번영을 위해 지시한 일을 충실히 이행했고 그로 인한 결과를 마음껏 만끽했을 뿐이었으니까.


흑사병의 재앙에서 베네치아를 지키기 위해


산 마르코 광장을 나와 조금 더 걸으면, 산타 마리아 살루테 성당이 보인다. 이 성당은 유럽을 강타한 무시무시한 전염병인 흑사병이 사라진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 지어진 성당이다. 당시 산타 마리아 살루테 성당을 짓기 위하여 110만개에 달하는 나무 말뚝을 박아 지반을 다졌다고 한다. 그만큼 대공사였으며 베네치아 인들의 염원이 담긴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흑사병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1/3을 앗아갈 정도로 치사율이 높았으며 한번 감염되면 피부가 검게 변하며 죽는 무시무시한 병이었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여겨지는데 주로 실크로드 등 무역로를 통해서 전파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당시 동방무역으로 번성했던 베네치아도 흑사병에 대해서 매우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베네치아는 갯벌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매우 습하고 폐쇄적인 도시 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한번 흑사병이 창궐하면 떼죽음을 당하기 쉬웠다.


그래서 베네치아 사람들은 외부의 선박이 베네치아에 도착하면 바로 그 배를 안으로 들이는 것이 아니라 본섬과 떨어진 지역에서 40일 동안 그들을 정박하게 하고 선원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에야 그들을 받아들였다. 일종의 검역 조치인데 현대 공항이나 항구에서 이루어지는 검역의 시초가 베네치아였던 셈이다. 해외여행을 갔다가 국내 공항으로 돌아오면 검역, 영어로 '쿼런틴(Quarantine)'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그 어원이 이탈리아어로 40을 의미하는 '쿼란타(Quaranta)'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흑사병으로부터 베네치아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얼마나 노력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리얼살루테.jpg 산타 마리아 살루테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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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부를 상징하는 시계탑


산 마르코 광장 한편에 화려한 시계탑이 하나 있다. 이름은 토레 델 오롤로지오. 상층부는 날개 달린 사자로 장식되었고 황도 12궁과 로마 숫자로 시간을 표시하는 이 거대한 시계탑은 베네치아의 부를 상징했다. 또한 시간을 알리는 본연의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베네치아 부두에 나가 일하던 뱃사람들은 이 시계의 소리에 맞춰서 물 때를 가늠하고는 했다고 한다. 이 시계탑에 대한 전설도 하나 있는데, 베네치아 사람들이 시계탑이 완성되자 너무 흡족한 나머지 시계탑 건설과 관련된 장인들의 두 눈을 멀게 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시계탑을 능가할 다른 시계탑이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리라. 아름다운 건축물에 따라붙는 흔한 이야기 중 하나이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씁쓸하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 독점욕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어서.


토레_델_오롤로지오.jpg
시계탑.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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