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정치의 시대는 가고 힘의 시대가 시작된 때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있다면 밀라노에는 스포르차 가문이 있다. 스포르차 가문 또한 메디치 가문 못지않게 그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밀라노에는 스포르차 가문의 성인 스포르체스코 성이 아직도 잘 남아있다. 두 가문 모두 각 도시를 대표하는 가문이지만 두 가문이 성장하게 된 배경은 매우 상이하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은행업 등 상업적인 재능을 기만으로 하여 성장하였다면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은 용병업으로 성장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용병업이 꽤나 각광받는 업종이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상공업이 발달하여 막대한 부를 가졌지만 그 부에 걸맞은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인 비용 측면에서 판단한다면 도시의 시민들로 상비군을 꾸리는 것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편이 더 싸게 먹혔다. 상비군은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서 계속 봉급을 줘야 했으니까. 게다가 전장에서의 실력도 어쭙잖은 상비군들 보다 전쟁을 업으로 삼는 용병들 쪽이 더 나았다. 용병들 쪽에서도 그 직업은 꽤나 수입이 괜찮은 편이어서 중소 영주들 중에서도 용병업을 부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스포르차 가문도 그들 중 하나였는데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였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유력 정치인들이 그의 고객이었으며 그는 그 고객들의 요구에 확실하게 보답할 만큼 뛰어난 군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명망 높은 용병대장(콘도티에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명망 덕분인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밀라노 공작이었던 비스콘티 가문의 사위가 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비스콘티 가문의 뒤를 이어 밀라노의 지배자가 되었다.
스포르차 가문도 그들 중 하나였는데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였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유력 정치인들이 그의 고객이었으며 그는 그 고객들의 요구에 확실하게 보답할 만큼 뛰어난 군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명망 높은 용병대장(콘도티에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명망 덕분인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밀라노 공작이었던 비스콘티 가문의 사위가 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비스콘티 가문의 뒤를 이어 밀라노의 지배자가 되었다.
스포르차 가문의 가문의 영광은 그의 아들인 루도비코 스포르차 대에 까지 이어졌다. 무어인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얼굴빛 때문에 일 모로(무어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게다가 정치적 야심도 매우 컸는데 단순히 밀라노를 차지한 것을 넘어서 이탈리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에 떠오르던 강대국인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현재의 오스트리아 등)의 갈등을 이용해서 중간에서 실리를 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대국들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까지는 그도 깨닫지 못했나 보다. 프랑스 왕의 미움을 사게 된 그는 프랑스 왕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밀라노 공작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결정적으로 몰락하게 한 것이 바로 스포르차 가문이 대대로 종사한 용병업의 역설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용병이란 것은 돈으로 쉽게 필요한 군사력을 살 수 있는 수단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상대도 얼마든지 돈으로 용병들의 충성심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당시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휘하에 있던 용병들은 당시 최고로 여겨지는 스위스 용병들이었는데 하필 프랑스 왕이 고용한 용병들도 스위스 출신들이었다. 전장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데에 있어서 거부감을 있기도 했고 프랑스 왕이 스포르차 가문보다 더 많은 급료를 쳐준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했다. 곧 스포르차 가문 쪽의 스위스 용병들은 군영을 떠났고 용병들에게서 배신을 당한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카를 5세의 로마 약탈 때 교황에게 신의를 지켰던 스위스 용병들도 차마 동족에게 칼을 돌릴 수는 없었나 보다. 물론 상대적인 박한 급료도 상당한 영향이 있었겠지만.
군주론으로 유명한 마키아 벨리는 금전적인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이러한 용병들의 특성에 대해서 경계했다. 용병들은 돈을 더 많이 주는 고용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아무리 오래도록 섬겼던 고용주라도 배신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키아 벨리는 피렌체에서 시민들로 상비군을 창설하려고 했지만 이미 용병을 쓰는 안락함에 빠져버린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국가들의 유력자들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만연하게 퍼진 용병 사용은 장기적으로 이탈리아 전체의 군사력을 약하게 하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각 도시들이 앞다투어 필요할 때마다 용병들을 사용하다 보니 결국 전장에서 실제로 싸우게 되는 것은 동종업계에 몸담는 용병들이었다. 다시 말해, 전에는 같은 편에서 싸우기도 했던 동료들인 것이다. 당연히 단순히 돈만 지불하는 고용주와의 관계보다는 유대감이 높았다. 그래서 실제로 전쟁의 승패는 실제 총칼이 부딪힌 결과라기보다는 군대의 위세나 숫자 혹은 협상의 결과인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군대의 전투력보다는 화려한 군장 등에 치중하게 되었고 이것은 이탈리아의 군사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려서 결국 이탈리아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등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시 말해, 도시국가들의 전성기가 끝나고 외세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슬픈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스포르체스코 성의 뒤에 있는 큰 공원을 지나면 평화의 문을 만날 수 있다. 평화의 문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 파리, 로마에서 만난 개선문들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지녔다. 사실 이 평화의 문인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로 입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일종의 개선문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유럽 내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프랑스군이 밀라노로 진군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초에 나폴레옹의 개선을 기념하기 위해서 짓기 시작했던 평화의 문은 다 지어질 때 쯤에 나폴레옹이 몰락하게 되었고 나폴레옹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복고 체제가 유럽에 설립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 체제이다. 프랑스와의 유럽 내 패권 경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승리한 것이다. 그 여파는 평화의 문 건설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나폴레옹의 개선문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문은 나폴레옹 이후 복고 체제의 평화를 상징하는 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탈리아인들의 땅에서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어진 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서 좌우되었던 이탈리아의 운명도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함께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다. 나폴레옹 3세와 연합한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오스트리아 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당당하게 밀라노에 입성했다. 나폴레옹 3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삼촌의 뒤를 이어 밀라노에 입성하게 된 셈이었고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다르게 성공적으로 외세를 활용하여 오스트리아를 밀라노에서 축출한 셈이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통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이탈리아는 외세에 의해서 좌우되는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밀라노는 현대적인 도시이기 때문에 지하철이 매우 잘 되어있다. 그래서 이동할 때 지하철을 많이 타게 되는데 한 번은 나빌리오 운하로 가는 열차 안에서 우리에게 말을 거는 꼬맹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딱 보아도 많아야 12살 정도나 되었을까. 그 정도 어린아이들 서넛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자꾸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말도 안 되는 말이다. 특히 한 아이가 자꾸 나를 툭툭 치며 '두오모!'를 반복해서 외쳤는데 그 와중에 다른 아이는 자꾸 내 가방 위로 패딩 재킷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쳐다보면 자꾸 '소리''소리'라고 겸연쩍게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아 순간 직감이 왔다. 소매치기다! 한 명이 내 주위를 분산시키고 다른 한 명이 패딩으로 내 가방을 덮고 가방 안을 열어 귀중품을 털어가려는 수법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매우 미숙했다는 점이다. 나는 일단 귀중품이 든 가방을 꽉 움켜쥐었고 아내에게 나지막하게 잠깐 물러나 있으라고 말했다. 아마도 빈틈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아이들은 다음 역에서 하차했고 그중 한 아이는 능청스럽게, 배우가 무대를 떠나며 관중들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나에게 작별 인사까지 하고 갔다. 이쯤 되면 속는 사람이 더 문제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아이들이 물러간 뒤 아내에게 혹시 저 아이들이 소매치기인 것을 알았냐고 물어보니, 전혀 눈치도 못 챘다고 했다. 사실 유럽 여행도 초짜 때는 소매치기에 많이 당하는 데 한 두번 당하다 보면 싸하고 드는 감이란 것이 생기는가 보다. 물론 나도 많이 당해봤으니까 생긴 감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아이들까지 소매치기를 해야 할 정도인가 싶어서 매우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