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란 무엇인가
서양문화권에서는 로마가 모두 오늘 정통성의 근원이다. 현재의 유럽 문명의 뿌리이며 로마의 후계자를 칭하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자신이 서양 문명의 적자임을 표방하는 것이며 이 것은 유럽 세계를 지배할 명분과 그에 따를 실리를 가져다주었다. 반면 동양권은 어떨까. 동양 문화권의 중심은 전통적으로 중국이었다. 광활한 평야를 품은 화북의 평야와 양쯔 강 유역의 풍부한 수량은 중국의 왕조들에게 폭발적인 생산력을 가져다주었고 그 생산력은 주변의 국가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주었다.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한 조공 질서 체계는 동양 문화권의 독특한 외교 및 무역방식으로 동양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대신 중국의 보호와 그 영토에서 생산되는 물자들을 그 대가로 받는 형태였다. 중국의 황제란 것은 중국 대륙을 넘어선 동양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황제가 머물었던 곳, 중국 북경에 나는 갔다.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가 된 것은 원나라 때였으나 현재의 베이징의 모습을 만든 것은 명나라 때이다.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이 처음 명나라를 건국했을 때의 수도는 지금의 난징이었다. 베이징이 명나라의 수도가 된 것은 3대 황제인 영락 제때이다. 영락제는 본디 주원장의 아들이었으나 장남이 아니었기에 명나라 건국 직후 베이징 지역을 포함한 동북지역의 왕으로 봉해지는 데에 그쳤다. 황제의 자리는 주원장의 장손에게 이어졌는데 상당히 유약했던 모양이다. 야망이 강했던 영락제가 그가 가진 힘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하고 그의 근거지였던 베이징 지역을 수도로 삼게 된다. 그래서 베이징이 북쪽의 수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인가. 황제가 머무는 곳이니 마땅히 궁궐이 있어야 한다. 베이징에도 궁궐이 있는데 그 이름이 자금성이다. 사실 궁궐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가까운 규모이다. 그래서 자금성의 영문명은 포비든 시티이다. 그 비밀의 도시에 나는 입성했다. 숨겨진 도시답게 수많은 관문을 거쳐야만 했다. 높은 성벽이 궁궐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성채를 연상케 했다. 관문들을 거쳐 황제의 정치가 이루어졌던 외조가 나왔다.
외조에 앞에 서있는 청동사자상이 눈길을 끈다. 동양에서 사자란 사악한 것을 몰아내는 역할도 수행하니 황궁 입구와 어울리는 장식이라 할 수 있다. 사자상들을 뒤로하고 외조의 중심 건물인 태화전으로 향했다. 태화전의 중심 단어는 화(和)이다. 화합 그 자체인 것이다. 한족이 아닌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중국 대륙, 더 나아가 동양 문화권의 국가들이 이 황제 아래에 조화를 이루면서 살라는 뜻 같아 묘했다. 태화전의 대리석으로 만든 3개의 단이 눈길을 끈다. 황제 발길이 닿는 주요 건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황제의 색인 황금색에 가까운 기와가 웅장함을 더 한다. 태화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같은 곳으로 황제가 고관대작들과 정치현안들을 논하며 제국을 이끌어 갔다. 능력이 아닌 혈통에 따라 이루어지는 황제 제도가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라는 선진적인 관료 채용방식과 그로 인해 우수한 인재들로 꼼꼼히 채워진 관료제가 그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체제 존속의 명분과 큰 방향만 제시하면 된다. 실무는 관료들이 다하니까.
외조를 지나 황제의 사적 공간인 내조로 향한다. 내조 앞으로 가니 외조 앞에서 봤던 사자상이 있는데 청동이 아닌 황동색이다. 특이한 것은 이뿐이 아니다. 사자의 귀가 귀엽게 접혀있다. 왜 이런 모습으로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니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어도 모른 척, 눈길도 주지 말라는 뜻 같다. 내조의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거나 발설했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는 무언의 경고 같이 느껴졌다. 내조의 건물들의 특징은 건물의 이름에 만주어가 병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는 명나라가 사용하던 자금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과거를 통해 뽑힌 관료들이 대부분 한학에 능통한 한족들이기에 그들과의 공존의 공간인 외조에는 대놓고 만주어를 병기할 수 없었겠지만 황제의 사적 공간인 내조의 경우는 만주어를 병기해도 큰 무리는 없다. 황실의 자손들에게 몸은 베이징에 있어도 선조들의 고향인 만주를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기에도 그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조의 중심건물은 황제가 기거했던 건청궁이겠지만 내가 관심 있었던 건물은 황후의 공간인 교태전이다. 동양을 지배하는 것이 황제라면 그 황제를 지배하는 것은 황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교태전 안에는 크게 무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황후와 황후의 가문인 외척은 황제의 든든한 동맹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황제의 생명과 권력을 가장 가까이서 위협하는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역사상 황후와 외척에 의해 목숨을 잃은 황제들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외척과 더불어 내조를 지배하는 또 다른 한 축은 환관들이다. 황제와 황제의 여인들 가장 가까이서 그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환관들은 자신들의 생식능력을 자의 혹은 타의로 제거했다. 이들은 황제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이기도 했으며 이들 중 몇몇은 정치나 학문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때때로 궁궐의 높은 담벼락을 이용해 황제의 눈과 귀를 막고 왕조를 멸망으로 이 끌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황제는 외조와 내조에서 고관대작, 외척, 환관들과 권력의 외줄 타기를 하며 자신과 중국의 운명을 짊어져갔던 외로운 존재들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