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큰 사찰, 동대사
오사카에서 전철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나라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교토가 일본의 수도가 되기 전에 일본의 수도였던 곳으로 고대 일본의 태동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현재는 사슴공원과 동대사로 유명한 곳이며 많은 관광객들이 아이들과, 혹은 연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찾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사슴공원이 매우 유명한데 나라 시내를 다니다 보며 곳곳에서 사슴 무리를 만날 수 있다. 사실 이 곳에 오기 전에 상상했던 모습은 귀여운 아기 사슴들이 사람들과 정답게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현실은 약간 달랐다. 매우 거대한 사슴들이 호시탐탐 사람들이 주는 간식을 노리고 있었고 때로는 어서 간식을 내놓으라는 듯 사람들 주위를 어슬렁 거렸다. 사람들의 멘 가방을 툭툭 건들여보기까지 하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사슴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을 전통 일본 과자인 센베였는데 누군가 센베하나를 들고 있으면 우르르 몰려드는 그 기세에 질려 미처 시도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수많은 사슴 무리를 지나 나라의 또다른 명물 동대사에 닿았다.
동대사는 말 그대로 동쪽의 큰 절이다. 대체 얼마나 큰 절이기에 이름부터가 큰 절일까 싶어 궁금증이 일었다.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고 경 내에 들어서니 어마 어마한 대불전이 내 눈에 가득 들어온다. 목조건물이라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고개를 위로 올려 봐야 할 만큼 큰 대불전이다. 단순히 그 크기뿐만 아니라 한국의 절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이 나의 눈을 사로잡는다. 특히 대불전 지붕에 금색으로 빛나는 장식이 나의 눈길을 끈다. 이 황금색 장식은 치미라고 불리며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치미는 일종의 화기를 막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화재에 취약한 구조를 가진 대불전이 화재로부터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와 같은 장식을 한 것이란다. 물을 연상시키게 하는 물고기 지느러미로 화기를 잡는다니 재미있는 생각이다.
대불전 앞에 들어서자 빨간 망토를 두른 목각인형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그 괴이한 모습도 모습이지만 사람들이 이 근처를 떠나지 않는다. 이 목각인형은 빈주루 존자라고 불리는데 이 빈주루 존자의 몸을 만지면 아픈 곳이 낫는다고 한다.
빈주루 존자를 뒤로 하고 대불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불전 안에는 거대한 청동불상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통 절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에는 항상 그 절이 모시고 있는 부처님이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이나 이것은 커도 너무 컸다. 이 불상의 손바닥에만도 남자 어른 서너명을 거뜬히 올라설 수 있을만한 규모이니까 말이다. 당시 고대 일본의 국력과 기술력의 총집합되었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대불전도 그렇고 그 안에 모셔진 불상도 그러하고 전체적인 절의 규모도 매우 거대해 동대사라고 이름 붙인 이유와 그 자신감을 알 것 같다.
헌데 왜 이토록 거대한 절이 필요했던 것일까? 지금이야 종교가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지만 불과 100년 전 까지만 해도 종교는 그 시대와 사회를 아우르는 사상 그 자체였다. 또한 통치자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동대사가 건축되었던 시기는 쇼무 천황 때였는데 당시 일본에 지진과 기근 등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나 나라의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하던 때였다고 한다. 이러한 나라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통치의 굳건함을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와 같은 큰 절을 짓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또한 고대의 불교는 기복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니 정말로 부처님이 영험한 힘을 발휘하여 그들을 지켜주리 라는 생각도 있었지 않았을까. 이유야 어떻건 간에 그 덕에 나는 이렇게 멋진 절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지만 불교가 처음 각지에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토착종교와의 갈등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일본 또한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진통을 겪고 나서야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삼국 중 신라의 경우도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야 비로소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다.
일본의 전통종교는 천황을 비롯한 여러 전통 신을 모시는 신토로 일본의 전통 귀족들이 믿는 종교였다. 당시 일본에 불교를 들여오려고 했던 사람들은 천황의 외척인 소가가문이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유입된 도래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일본의 발전을 위해서는 불교의 유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불교의 도입이라는 것은 중앙집권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국가 전체를 하나의 사상으로 묶고 불교를 국정운영의 철학으로 삼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불교의 도입은 단순히 종교적인 갈등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몇 차례의 피비린내나는 갈등 끝에 쇼토쿠 태자를 포함한 천황가에서도 불교의 도입을 지지하면서 일본은 불교를 도입하게 되고 그 덕분에 우리가 나라의 동대사를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