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남국, 오키나와
한국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남짓 한 곳에서 남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면 믿겠는가. 일본 열도의 남쪽, 대만의 북쪽 즈음 위치한 오키나와는 바로 그런 섬이다. 일본인들이 가고 싶어 하는 휴가지로 손꼽는 곳이기도 하고 그만큼 휴양지로서 매력을 한껏 갖춘 곳이기도 하다. 흔히들 동경하는 에메랄드 빛 바다와 열대의 기후를 맘껏 만끽할 수 있고 스노클링, 스쿠버 다이빙 등 온갖 해양 스포츠를 맘껏 즐길 수 있어 매년 일본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찾는 관광의 섬이다.
그러나 이런 휴양지로서의 모습만이 오키나와가 가진 모습의 전부는 아니었다. 강렬한 태양빛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각종 해양스포츠로 단련된 탄탄한 몸매, 그리고 느긋하지만 쾌활한 성격을 가진 오키나와 사람들은 조용하고 예의 바른 일본 본토 사람들과는 다른 정겨운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 본토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섬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오키나와의 매력은 이들의 지난 역사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오키나와는 원래 일본에 속한 섬, 정확히 말하자면 나라가 아니었다. 오키나와는 독립된 나라로써 50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번성해왔고 그들만의 문화를 꽃피어왔다. 이른바 류큐라고 불린 나라가 바로 오키나와 인들의 나라였으며 동남아와 동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일찍이 중개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해상왕국이었다. 특히 중국 명나라 시대 때에는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이었던 조공·책봉 체제를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더 나아가 명나라로부터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책봉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당당한 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었다.
중국과의 무역관계를 통하여 성장한 나라여서 그런지 오키나와 곳곳에는 아직 중국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오키나와의 마스코트인 ‘시샤’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시샤’는 한자 그대로 사자라는 뜻인데 액운을 쫓는 존재로 알려져 있으며 오키나와 관공서, 가정집, 심지어 쇼핑몰에서까지 이 ‘시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살지도 않는 사자가 왜 오키나와의 마스코트가 되었는지는 중국의 영향이라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중국에서 사자가 가지는 의미만 보아도 오키나와와 중국의 유사성을 잘 알 수 있는데 중국에서도 사자는 액운을 쫓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매년 춘절 때마다 사자춤을 추며 사악하고 부정한 기운을 몰아내고자 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에서도 역시 사자춤이 있으며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오키나와이지만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화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키나와가 가진 열대의 기후와 환경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야생’의 모습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시샤’가 오키나와와 중국의 긴밀했던 관계와 해상무역으로 번성했던 시기의 오키나와를 상징한다면 오키나와의 독사인 ‘하브’는 오키나와의 야생성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하브’를 아무렇지 않게 다루고 ‘하브’로 담근 뱀술을 일상생활에서 아무렇지 않게 벌컥벌컥 마시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모습은 정글에서 갓 뛰어나온 야생의 전사를 연상시킨다.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그들 본연의 야생성을 잊지 않고 있다고 포효하는 것 같았다. 사실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으랴. 오히려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상대하면서 중국의 속국이 되지 않고 그들과 구별되는 문화를 발전시킨 것만으로도 오키나와인들의 저력은 높이 살만 하다.
이러한 오키나와 인들의 저력은 아직까지 후대에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메이지 유신 시절 일본의 한 현으로 편입된 이래로 일본의 일부가 된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시절 일본 제국군의 총알받이가 되기도 하는 등 많은 아픔을 겪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지금의 번영을 이끌어 냈다. 아직까지도 오키나와는 주일미군의 주둔 등 일본 정부로부터 많은 불이익을 강요받고 있고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차별받고 있지만 그래도 오키나와 인들은 굴하지 않으며 끝까지 일본인들에게 동화되지 않고 그들 땅의 강렬한 태양처럼 그들의 존재감을 한껏 발산할 것 같다.
오키나와의 중심부인 나하 시 부근에 아주 흥미로운 곳이 하나 있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편입되기 전, 다시 말해 오키나와가 독립왕국이었던 시절의 수도, 슈리성이 바로 그곳이다. 슈리성을 한자 이름 그대로 해석하면 우두머리 마을에 있는 성(首里城)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 자체가 이곳이 오키나와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나타내는 느낌이다. 슈리성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공원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다 보니 비교적 늦은 시간에 방문했음에도 이곳을 찾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유료 구간을 제외하고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보다 즐겨 찾는 모양이다. 슈리성으로 안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드디어 슈리성의 중심부가 등장한다. 바로 류큐왕국의 정치가 이루어졌던 정전, 북전, 남전 등이다.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쯤 될까. 이 슈리성의 전각들을 보면 류큐왕국이 일본보다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붉은빛의 기와로 구성된 전각의 지붕들은 중국 남부의 건축양식과 많이 닮아있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면 류큐왕국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당시 류큐왕국의 왕이 입었던 예복 등을 보아도 일본의 전통 복식보다는 중국의 전통복식을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류큐 왕국 자체가 중국과의 조공무역을 통하여 번성한 나라였고 중국 황제의 책봉을 통하여 류큐 왕국의 오키나와 지배에 대한 대내외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 때문에 일본 규슈지방의 번주였던 시마즈 가문이 오키나와를 지배했을 때에도 류큐왕국이 가진 조공 무역권 때문에 류큐왕국을 자신의 영토에 직접적으로 편입시키지 못하고 간접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사실을 중국이 알게 된다면 류큐왕국이 가진 조공 무역권은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의 조공무역이 끊긴 일본의 입장에서는 류큐왕국이 가진 조공 무역권이 매우 간절했다. 이처럼 조공무역은 류큐왕국의 생명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공무역이 류큐왕국이 중국에게 의존하는, 일방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에게도 류큐왕국과의 조공무역이 매우 긴요했던 모양이다.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위치 탓에 류큐왕국에는 동남아와 동북아의 물산들이 손쉽게 몰려들었고 중국에게 류큐왕국은 이러한 물산들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줄 수 있는 파트너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시기가 바로 류큐왕국에게는 황금기였던 셈이다. 현재 슈리성에 남아있는 중국의 흔적들은 어쩌면 류큐왕국의 화려한 시절이 남긴 영광 인지도 모른다.